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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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스톡홀름, 마당이 내다보이는 방에 앉아 한 여성이 글을 쓰고 있다. 사방에 장식이라고는 없는 리넨 천을 널어놓은 아주 작은 주방이다. 둥지, 마음, 내부. 마치 안팎을 뒤집어놓기라도 한 듯, 이 방은 방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차분하고 고요하며 외로운 밤이 되면 그는 글을 쓴다. 어머니의 숨소리와 벽 안쪽 파이프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뚫고 들려온다. 조만간 적대적으로 변하게 될 또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그는 밤을 쓴다. 아니면 밤이 그를 쓴다고 해야 할까?   p.249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열여섯 소녀 함므다 좀마는 사진을 움직이는 마법에 푹 빠져든다. 움직이는 사진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에게 이야기 값을 내느라 엄마 몰래 빵을 훔치기도 하고, 상점에서 렌틸콩을 슬쩍하기도 한다. 그녀는 영웅과 자유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을 느낀다.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 앉아 일기를 쓰는 중이다. 그곳은 희고 거대한 감옥, 홀로 지내기에는 지옥 같은 곳이다. 노령의 대통령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수심으로 가득하다. 런던 교통국에서는 근무하는 여성 500명에게 해고 통보를 한다. 이제부터 수개월에 걸쳐 런던의 모든 버스 및 전차의 여성 안내원들이 직장을 잃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1947 1 1, <타임스>는 영국인들을 향해 더 이상 시계를 믿지 말라고 알린다. 사람들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BBC 방송에 다이얼을 맞춘다. 전기식 시계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정전의 영향을 받았고, 기계식 시계는 정기적으로 점검을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유럽 전역에 걸쳐 피해가 속출했다. 수십 만 채의 건물이 사라졌고, 소도시와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수천 명의 노숙자가 생겼고, 모두들 물과 전기의 제한적인 공급에 대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계를 훔치고, 숨기고, 엉뚱한 곳에 두고, 잃어버린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라진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12, 뉴욕, 시간은 균형을 이루어 흐르지 않는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르며, 되돌릴 수도 없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과 같아서, 깨진 조각들은 이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복원될 수 없다. 또한 어떤 시점이 다른 시점보다 더 현재인지를 가리기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내가 한데 모으고 싶은 것은 1947년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모아 맞추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하나로 뭉쳐져야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산산이 조각난 슬픔이다. 폭력에 대한 슬픔, 폭력에 대한 부끄러움, 부끄러움에 대한 슬픔.    p.333

1947년 한 해 동안 세계에서 벌어진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세밀한 고증과 문학적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는 책이다. 스웨덴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는 1947년을 오늘의 세계가 태동한 결정적 순간으로 보았고, 그 한 해 동안의 세계사를 다룬 독특한 르포르타주를 써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고, 사람들은 과거의 비극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냉전의 열기는 점점 타오르고, 미국은 CIA를 창설하고, 소련은 핵 보유국이 된다. 파리에서 디올은 뉴룩을 선보여 세계 패션계를 뒤집어놓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 2의 성>을 썼고, 조지 오웰은 죽음을 앞둔 채 <1984>를 탈고한다. 프리모 레비는 숱한 거절 끝에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만난다. 빌리 홀리데이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동시에 마약 투약 혐의로 수감된다. 최초의 컴퓨터버그가 발견된다.

이처럼 1947년은 너무 많은 일들이 너무 빠르게 벌어졌던, 역사의 또렷한 단층을 만들어낸 시기였다. 저자는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선별하고 재배치해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역사를 현재로 가져온다. 1년 열두 달, 154개의 시공간, 220명 이상의 등장인물로 1947년의 정치, 사회, 문화적 변혁을 재구성했다는 것도 뛰어나지만, 문장이 유려하고 매력적이어서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이야기이다. 게다가 평범한 개인의 역사와 당대를 뒤흔든 사건들이 교차 진행되고, 모두 현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의 동시대성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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