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책 -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물건의 역사
키스 휴스턴 지음, 이은진 옮김 / 김영사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파피루스에 글씨를 쓰는 경험이 불만스럽더라도, 파피루스를 생각해낸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파피루스처럼 가볍고 유연하고 내구성이 좋은 필기 재료가 없었으면 두루마리가 존재할 수 없었을 테고,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없었으면 책이란 것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이 살려면, 먼저 파피루스가 죽어야 했다.    p.41

도서관에서 가면 특유의 냄새가 있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 책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만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를 좋아한다. 한때는 그 냄새가 좋아서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간 적도 있을 정도로 내게는 친숙함을 불러일으키고, 안정감을 주고,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냄새다. 아마도 아주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종이의 냄새에 반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종이책을 사랑한다. 책들을 보관하는 문제 때문에 전자책을 사서 보던 시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종이책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종이를 한 장 넘길 때의 그 소리와 촉감, 냄새를 사랑하고, 책이라는 물건이 지니고 있는 무게와 품격, 그리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을 때의 그 존재감을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덕분에 서재의 전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바닥에 쌓이기 시작한 책들로 인해 지금은 마치 미로처럼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키스 휴스턴의 <책의 책>은 바로 그렇게 종이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한 완벽한 선물 같은 책이다. 책이 사물로서 갖는 물성, 즉 책의 몸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매혹적인 공예품에 관한 러브레터, 책에 바치는 오마주, 책을 책이게 한 책 덕후들의 이야기이다. 종이와 잉크, 판지, 풀로 이뤄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장치로서의 책, 질량과 냄새가 있고, 무게가 있고,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사물로서의 책 말이다. 저자는 점토판과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지금의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으로 진화해온 책이라는 물건의 흥미로운 2,000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다.

 

레코드판에서 CD로 넘어간 음악 애호가들이나 DVD에서 블루레이로 갈아탄 영화광들, 종이책에서 전자책으로 넘어간 독자들이라면, 마르티알리스의 마케팅 전략에 전율할 것이다. 시인 마르티알리스는 글 몇 줄로 '양피지로 만든 소책자'라는 새로운 미디어 형식을 소개하고, 이 새로운 매체로 제작한 자기 책을 사라고 독자들을 부추기고, 정확히 어디로 가면 자기 책을 파는 서점을 찾을 수 있는지까지 알려준다.    p.393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시작해 동물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 시대가 온다. 하지만 양피지의 불가사의한 매끄러움과 고혹적인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는 동물의 죽음에서 시작된 유혈이 낭자하고 아주 폭력적인 기나긴 과정의 산물이었다. 잔인한 해부 과정을 하나하나 거친 끝에야 겨우 양피지 한 장이 나온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 최초의 종이를 발명하게 되는데 종이의 제작 방법과 발전하게 되는 과정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72단계나 거쳐야 겨우 한 장 나오는 종이 생산 과정이 기계화하면서 효율을 높이게 되었고, 19세기 중반 목재 펄프로 종이를 만들게 되면서 원재료인 넝마 품귀 현상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 이렇게 종이의 탄생과 생산 과정을 거쳐 다음에 이어지는 항목은 '본문'이다. 인쇄술에 관한 흥미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삽화'를 거쳐, '무선 제본' '페이퍼백 장정' 등으로 책이라는 것이 점점 더 진화해오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섞인 구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책의 원형은 15세기 말 무렵 한 인쇄공의 손에서 결정되었고, 1,000년이 넘는 책 제작 전통을 바꿀 접착식 제본으로 특허를 신청하고 나서 몇 년 뒤 영국의 기차역에서는 통속적인 페이퍼백 염가 소설책이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 인쇄, 제본, 삽화 등 책의물성이 그려온 역사를 인류 문명의 결정적 장면들과 교차해 풀어간 책의 생애사 자체도 재미있게 읽었지만, 사실 이 책은 남다른 디자인과 제작 방식으로 구현한 책의 구조로 읽기도 전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평범한 양장본은 표지로 쓰는 두꺼운 판지를 천이나 가죽으로 감싸는데, <책의 책>은 판지를 그대로 노출했다. 제목은 백박으로 제작했으며, 부제나 저자, 역자명은 검정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고, 책머리’ ‘책등등 책의 각부 명칭을 표시했다. 내지에도각주’ ‘캡션등 구성 요소의 명칭을 넣어 책의 신체 구조를 환기할 수 있게 해서 '사물로서의 책' 그 자체를 고스란히 느끼면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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