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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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메리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대한 마지막 수업을 하던 중에 어떤 의문이 들어 말을 중간에 5초 정도 멈추게 된다. 그 의문을 말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냥 거리를 헤매다가 이 교실로 들어와 이 어린 아이들에게 생명의 신비에 대해 설명해 대기 시작한 미친 여자일지도 몰라. 그리고 이 아이들은 내 말을 믿고 있어. 내가 모든 것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데도."    p.53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백만 년 전인 서기 1986년에서 시작된다. 당시만 해도 인류는 3킬로그램짜리 거대한 뇌를 가지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곳에서 제임스 웨이트라는 이름을 지닌 서른다섯의 미국인 사내가 2주간의 유람선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그 배의 첫 번째 갈라파고스 항해는 '세기의 자연 유람선 여행'으로 전 세계에 걸쳐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광고되었다. 백만장자인 웨이트는 사실 대단한 사기꾼이기도 했다. 무려 열일곱 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꾀어 결혼한 뒤, 그녀들의 재산을 몽땅 다 털고는 잠적해 버린 고도의 협잡꾼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갈라파고스 제도로 가는 길에 과야킬에 왔을 즈음, 세계의 실상은 이러했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로 인해 자산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거의 모든 곳에서 관광업이 망해 버린 상태였다. 따라서 아직 문을 열고 있는 호텔도 엘도라도 호텔이 유일했고, 항해할 준비를 갖춘 유람선 또한 바이아데다윈호 하나뿐이었다. 이백 개의 침상을 갖춘 그 호텔에 손님이라고는 웨이트를 포함해 여섯 명이 전부였다.

 

여기서 커트 보니것의 상상력은 휴가차 떠나는 유람선 여행을 진화의 여정으로 바꾸어 버린다. 인류가 종말을 맞는 바람에 갈라파고스 제도에 좌초된 생존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어 버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류 최후의 생존자들과 함께하는 진화의 여정이 만만치는 않다. 이야기가 현재에서 과거로, 또 미래로 계속 바뀌고, 진화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가 유람선의 승객들과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화자 사진의 사연을 들려주는 등 정신 없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보니것이 비판하고 풍자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 않다. 물론 보니것식 풍자와 블랙 유머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모든 것들을 위트와 유머로 읽어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때 또다시 현실이 끼어들었다. 진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태양을 보니 작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선장은 밤새 내내 자기가 정확히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면 태양이 정확히 고물쪽에서 떠오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 태양은 분명 고물 쪽에서 떠오르기는 했지만 우현 쪽으로 무척 많이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태양이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위치할 때까지 배를 좌현 쪽으로 돌렸다. 그가 바로잡은 이 실수에 대해 책임이 있는 커다란 뇌는 그의 영혼에게 그 실수는 사소한 것이고 금방 바로잡았으며, 여명이 밝아 오면서 별빛이 흐릿해지는 바람에 일어났던 실수라고 납득시켰다.   p.254

갈라파고스 제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천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태평양에 위치해있다. 19개의 섬과 주변의 해양 자원 보호 구역은 '살아 있는 박물관과 진화의 전시장'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독특한 해양 생태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세 개의 해류가 만나고, 지진과 화산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다, 다른 섬들과 떨어져 있다는 고립성 때문에 희귀한 생물들이 많다고 한다. 찰스 다윈은 1835년에 이 섬을 여행했고, 이곳의 생물들을 보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을 주장하는 데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갈라파고스'는 바로 그 다윈의 진화론으로 유명해진 섬이기도 하다.

 

블랙 유머와 풍자의 대가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반전 작가인 커트 보니것 또한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영감을 얻어 인류의 멸망과 신인류의 탄생 과정을 그리는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극중 화자는 백만 년에 걸쳐 인류의 진화를 목도하고 생존자들을 굽어보면서 결국 희망을 놓지 않는다. '공중에서 봤을 때 한때는 아름답고 풍요로웠던 이 행성이 지금은 부검대에 노출된 불쌍한 로이 헵번의 병든 장기들과 비슷하단 것을?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인간들의 도시는 오직 성장만을 위해 성장하고 뭐든 닥치는 대로 다 먹어 치우며 망가뜨리고 있는 암세포들과 비슷하단 것을?'이라는 극중 문구처럼 인류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만들어 냈지만, 전쟁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보니것은 형편없이 크기만 한 인류의 뇌와 그 뇌가 말미암은 무수히 많은 인간들의 잘못을 끊임없이 비꼬고 풍자한다. 그리고 백만 년 후의 새로운 인류는 뇌의 크기가 점점 작아져 현 인류처럼 쓸데없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진화하기에 이른다. 보니것이 그려내는 20세기 최후의 인류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길. 엉뚱하고, 다소 정신 없지만, 독창적이고 놀라운 상상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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