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클리벤의 금화 1
신서로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묻겠습니다. 저를 서리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컷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먹으려 했다."

"하오면, 왜 먹지 않겠다고 하셨습니까?"

"먹고 싶지 않아졌으니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걸 묻고 있기 때문이다."     p.19

 

영주의 딸이 용에게 납치되었다. 행여나 용이 식사 거리가 아니라 노예나 시종으로 부리기 위해 잡아간 것이라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용이 그러한 습속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없다. 그러니 가난한 남작의 여덟 번째 딸인 울리케 피어클리벤은 용의 한 끼 식사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운명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애를 쓰고 운이 따라준다 해도 용의 소재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날이 지나갈 테니, 그 동안 울리케가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초에 지상 최강의 포식자이자 맹수인 동시에 신화의 계보를 증거하는 실재의 현현인 용을 인간의 군사력으로 격퇴하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가혹한 사태 앞에서 부정을 애써 꾹꾹 눌러 삼키며 영주가 침통해하고 있을 때, 용에게 잡혀간 울리케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시작된다.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자신의 먹이에게 "너를 먹겠다."는 선언 뒤에 이어지는 장면이 살육의 현장이 아니라 이상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울리케는 감히 용에게 말한다. "저는 제가 식용에 적합하다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신에 식은땀이 축축했고, 얼굴도 창백히 질려 있었지만 울리케는 까무러칠 것 같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용과 침착하게 대화를 시작한다. 이게 대체 무슨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설득과 이해가 가능한 판타지 세계라니, 우리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놀라운 서사 속으로 시작부터 빠져들고 만다. 사슴을 능숙하게 발라내고, 자신을 한 끼 식사로 처리하려는 용을 상대로 화려한 언변으로 협상을 시도하는 공주와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대신 인간의 이야기를 듣고, 인간과의 대화를 통해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드래곤이라니..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의 끝판왕이 아닐 수 없다.

 

 

너무 기가 막혀 잠에서 깨버린 울리케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용의 음성이 귓가에 아직도 생생하였다. 그들은 허락을 구할 줄 모른다 -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삼 자랑할 줄도 모른다 - 원래 그냥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숱하게 용사한다 - 가장 강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즈음에서야, 울리케는 어떤 호의를 갖고 있건 간에 이 용이 결코 만만치 않은 대화상대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p.358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에서 최장기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인기작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1권과 2권이 출간되었고, 시리즈는 8권으로 완간 예정이라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3, 4권이 2020년 초 출간될 예정이라 출간된 책의 이후 내용이 궁금하다면 브릿G에서 온라인 연재로 다음 이야기를 미리 만나보아도 좋을 것 같다. 이영도, 하지은을 잇는 한국 정통 판타지 문학의 귀환을 알린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데, 바로 그러한 판타지의 전형을 깨트리는 인물과 서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들이 전쟁을 주요 무대로 하거나, 분쟁의 해결 방안이 전투인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전투 대신 대화를 통해 '교섭'을 한다. 그리고 그 '교섭'이라는 장면의 대화들이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큭큭대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고, 기발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사실 '용에게 잡혀간 공주'라는 모티브는 신화에서부터 현대 판타지까지 단골 등장 소재이다. 흉포하고 절대적인 악 ''과 구원받아야 할 '공주', 그리고 용을 물리칠 '기사'. 그러나 이 작품에서 공주를 구하는 기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잇감으로 잡혀왔음에도 당당히 용과 입씨름을 하는 소녀 울리케와,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용이 등장한다. 특히 도입부의 90여 매에 이르는 용과 울리케의 먹히고 먹는 자의 '음식'에 관한 흥미로운 토론은 특히 백미이다. 이야기의 서두부터 낯선 전개에 당황스러웠지만, 페이지를 넘길 수록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