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 노지양 옮김 / 반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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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뢰라는 문제가 있다. 일반 폭행죄의 경우 경찰들은 눈에 보이는 상처나 손상을 입은 피해자를 대면한다. 하지만 성범죄에서는 상해의 정도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을 때가 많다. 법의학적 검사 단계에서조차 합의된 성관계를 한 여성과 총구 앞에서 강간당한 여성이 외견상 똑같을 수 있다. 성폭력에 있어서 만큼은 가해자의 신뢰성만큼이나 피해자의 신뢰성이 이슈가 된다.    p.30

2010 8, 워싱턴주 린우드에서18세 소녀 마리는 경찰에 강간 신고를 했다. 아파트에 침입한 낯선 남자는 그녀의 눈에 눈가리개를 하고 팔다리를 묶고 재갈을 물린 후 강간했다. 이후 일주일 동안 마리는 경찰에게 이 이야기를 반복했고, 진술할 때마다 말이 조금씩 바뀌기도 했다. 그 와중에 경찰은 마리를 의심하는 주변 사람들 이야기에 주목했고, 그녀에게 그러한 의심을 전달했다. 마리는 흔들렸고, 무너졌고, 결국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고 자백한다. 그녀는 대략 스무 곳 이상의 위탁가정을 전전했고, 일곱 살 때 강간당한 적이 있으며, 생전 처음으로 완전히 홀로 살아가게 되자 불안하고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결국 허위 신고죄로 기소되어 벌금형을 선고 받았고, 마리의 사건은 성폭력을 당했다는 주장과 신뢰성이라는 해묵은 논쟁을 대표하는 사례가 되었다.

사람들은 마리 때문에 진짜 성폭력 피해자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며, 그녀를 욕하고, 그녀에게 비난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 그리고 3년 뒤 진범이 잡히고, 마리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 중심에는 갤브레이스와 헨더샷이라는 두 여성 형사가 있었다. 그들은 보통 경찰들이 걸리기 쉬운피해자다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으며,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두 형사는 각기 다른 자신들의 관할구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조사하며 공조 수사를 했고, 아주 작은 단서 하나로 몇 년에 걸쳐 강간을 저질러오던 범인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책은 그 놀라운 과정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탁월한 탐사보도 르포르타주이다.

 

성폭력은 이미 가장 신고율이 낮은 범죄로 알려져 있다. 성폭력을 당했다고 나선 사람을 믿지 않고 허위 신고라고 단정짓는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진술을 꺼리게 되고, 범인이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며, 재범 확률도 높아진다. 많은 여성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거짓말을 한다는 잘못된 편견에 부채질을 할 수도 있다. 경찰 교육 책자에는 국제여성폭력방지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제안이 담겨 있다. "허위 신고는 보통 심각한 심리적, 감정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 "     p.215

이 작품은 2016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무고죄로 기소된 한 소녀와 연쇄강간범을 추적하는 두 여성 형사의 이야기는 너무도 리얼해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참혹하고, 끔찍하고, 슬프다. 성폭력을 둘러싼 수많은 편견과 오해와 불신의 과정들에 분노하며 읽었고, 우리 사회가 강간을 다루는 방식 안에 스며 있는 성차별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은 성폭력 2차 피해를 일으킬 뿐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를 무고 사범으로 몰아간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논픽션이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널리스트인 T. 크리스천 밀러와 켄 암스트롱은 방대한 서면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하여 웬만한 범죄 소설 못지 않는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불편한 사건의 전말을 전하면서도, 이야기로서의 서사가 있고, 시사하는 바가 명확한 놀라운 작품이었다. 국내에서도 미투 운동을 비롯해 안희정 지사 사건이나 몇몇 연예인들의 성폭력 사건을 보면,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회의적인 시선, 2차 가해가 줄을 이었다. 그러니 피해자들은 엄격한증명’에 대한 부담감과피해자다움의 잣대에서 고통 받고 무고죄로 기소 당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자신의 피해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하겠는가 말이다. 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거짓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는 유일한 범죄라고 한다. 수사기관부터 주변 지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피해자의 말을 의심하기 때문에, 강력범죄 중 신고율이 가장 낮은 범죄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폭력은 오랫동안피해자 없는 범죄’로 불려 왔다. 우리 사회의 성폭력 범죄 수사 시스템에 대해서도 조금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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