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김종관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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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 앞 치킨 집 처마 밑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닥의 패인 홈을 내려다보며 피로와 슬픔의 한 덩어리가 턱 밑까지 차 올랐다고 느꼈을 때, 나는 주변의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출발 자세를 하고 있었고, 관계에 서툰 청춘에 지쳐 있었다. 그 시간 위에서 마다가스카르행이라는 잠시의 상상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당시의 고단함을 이겼던 힘은, 가지지 못한 그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가지지 못한 위로야말로 때로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으로 둔갑하곤 하니까.   p.64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의 영화감독 김종관, 그가 창작이 정체된다고 느꼈던 시기에 글을 쓰며 지난날의 기억을 모았고, 빛바랜 사진을 들춰보는 기분으로 일상의 소소한 변화를 기록한 글이다. 그가 최초로 썼던 에세이 <사라지고 있습니까>의 개정증보판으로 1부에서 4부까지는 대략 십 년 전에 쓴 글들이고, 5부에서는 장편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을 작업했던 효자동에 살고 있는 현재의 일상을 담고 있다. 6부에는 안소희 주연의 <하코다테에서 안녕>과 아이유 주연의 <밤을 걷다> 시나리오가 수록되어 있다. 독백과도 같은 담담한 속삭임이 여운을 남겨주는 글들로 자신만의 시선으로 붙잡아둔 사진 속 풍경들이 영상처럼 감각적으로 읽힌다. 그가 눈과 마음으로 기록한, 어쩌면 잊혀질지도 모를 순간들을 만나 본다.

한 동네에 몇 년 살다 보니 어디에 목련이 있는지도 알게 됐다는 이야기 뒤에는 동네에 핀 목련 꽃들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새벽녘 집 앞에서 족제비와 마주친 적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글 뒤에는 창 너머로 보이는 푸릇푸릇한 새벽의 풍경이 실려 있고, 추석 연휴에 거리에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니 자신이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것 같다는 글에는 골목 끝에서 마주친 고양이의 사진이 등장한다. 그렇게 그가 끄적이는 단상들은 찰나에 포착된 순간들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연결되어 하나씩 스토리가 되어 간다. 아마도 영화라는 장르를 만드는 이라 그런지, 글들도 모두 영상처럼 읽히는 독특한 에세이가 되는 것 같다.

길 위에 시간들이 놓여 있다. 길을 가면서 자주 뒤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목적지도 모른 채 달려가는 것도 의미는 없다.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오늘을 지나 어제가 될 것이다. 오늘은 오늘일 뿐이지만, 수많은 어제가 나의 오늘을 움직인다. 그러니까 오늘을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거나,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후회하며 엉망진창으로 살든, 고민하며 살든, 우리는 어제가 만들어낸 길들을 밟고 오늘이라는 길 위를 걷는다는 걸 생각한다.     p.175

어린 시절의 혼자 놀기, 고등학교 시절의 하숙집, 꿈에서 만난 여자 이야기, 아버지와 함께한 첫 여행의 기억, 청주 거리에서 만난 그녀, 베를린에서 만난 돌로 만들어진 숲, 도쿄의 우에노에서 홋카이도의 삿포로까지 향하는 야간열차, 등등 과거와 현재, 일상과 여행, 가족과 친구... 그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그것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다. 후반부에 수록되어 있는 짧은 시나리오도 감독의 독백처럼 담담하고, 잔잔하게 읽힌다.

 

그는 '어떤 공간을 남기고 싶다'라는 열망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첫 번째 이유가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인상적인 공간을 만나게 되면 그곳에 시간의 개념을 더하고, 이야기를 덧대어 영화로 남기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가며 본 그날의 사건들, 고등학교 때 땡땡이치고 하릴없이 거닐던 거리들, 동네에 있는 대학교의 낡은 건물 학보사, 북촌의 골목들, 오래된 슈퍼가 있고 목련이 보기 좋게 피던 봄의 산책길들이.. 그의 영화 속에 등장했거나, 언젠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살면서 자신이 스쳐간 많은 순간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아주 근사한 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어떤 장소의 한 시절을 영화의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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