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진 하늘
루크 올넛 지음, 권도희 옮김 / 구픽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된 거야? 정상적인 대화조차 할 수 없게 됐잖아." 내가 말했다.

"우리 아들이 죽어가고 있어. 그게 우리한테 일어난 일이야." 애나가 말했다. 이미 그녀가 쓰는 어휘가 나와 달랐다. 내가 호스피스라는 단어를 아주 조심스럽게 작은 소리로 말하려고 애쓰는 동안, 애나는 '말기'라든가, '죽어간다'는 말을 편안하게 쓰고 있었다.

"그래." 나는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끔찍하다는 건 알아. 이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린 같은 편이잖아."     p.250~251

 

롭과 애나, 그리고 다섯 살난 아들 잭은 평범하고 행복한 가족이었다. 잭은 힘겹게 생긴 아이였다. 애나는 두 번 유산했고, 세 번째로 임신했을 때도 불안해했지만 결국 아이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어느 덧 다섯 살이 되었고, 통통하기만 하던 다리가 길어지고 아기 같던 말투도 사라져갔다. 롭과 애나의 세상은 도서관 책들과 부모로서의 저녁시간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어린 자식을 두고 있는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러하겠지만 말이다. 잭은 평범하게 자라고 있었고, 가끔 놀다가 의식을 잃거나 기절하듯 쓰러지곤 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병원에서 뇌종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성상세포종으로 수술로 제거할 수 있다고 했지만, 결과가 좋았음에도 암은 곧 재발하고, 잭의 병세는 깊어만 간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롭은 점점 아들의 치료에 관해 집착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게 되고, 급기야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인 애나는 이를 반대하고, 그들의 관계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향한다. 거대한 슬픔 앞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결코 누가 누굴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해서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결코 당사자가 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검증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방법이라도 시도해봐야 한다는 것과 이미 돌이킬 수 없다면 보내주어야 할 때를 받아들이고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고, 이해하고 싶었고, 응원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세상은 아침 서리가 내린 것처럼 바삭거린다. 너무 연약하고 깨끗해서 걸음을 내딛기가 두렵다. 주위를 둘러보니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세세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선반의 닳은 가장자리. 가로등 그늘 사이로 반사된 햇살이 양탄자 위에 만들어낸 빛의 무지개. 왜냐하면 이제 나는 제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름다리 아래 조용히 앉아 있을 때면 바람의 숨결과 대기 중에 떠도는 강물의 짭짜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새로운 과민증으로 이 세상을 느끼고, 보고, 듣는다. 마치 귀를 틀어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진 것 같다. 나는 이제 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p.354

 

저자인 루크 올넛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의 마지막 몇 달을 담담하게 다룬 논픽션을 자비출간해 호응을 받았고, 이후 30대 중반의 나이에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아 오랜 투병 기간을 거쳤다. 암 진단 이후에 둘째 아이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되어 자신의 병과 아이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겪어야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병을 극복했다. 그렇게 질병으로 인한 죽음과 그 과정을 이겨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이 책을 쓰게 된다. '자전적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그의 가족이 어린 아들을 불치병으로 떠나 보낸 것은 아니라서 독자로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이 비극이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만, 부모라는 존재에게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는 일은 그것이 타인의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너무도 끔찍하고, 참담한 슬픔을 동반하는 것이니 말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병으로 잃은 경험과 작가 자신의 긴 투병 기간이 있었기에, 이렇게 사실적인 작품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 그 자체를 클라이막스로 만들지 않고, 그 과정을 용기 있게 겪어 내는 과정과 남겨진 가족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있어 더 뭉클했던 작품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희망은 누군가를 미치게 만들기도 하고, 끔찍한 선택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싶어 하는 절망적인 사람들이 종종 이 작품 속에서 벌어진 것 같은 일에 휘말리게 되기도 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한 모든 과정은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가 없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러한 일들을 간접 경험하면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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