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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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는 그 시절 내가 겪어야 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다름' '섞임'의 세계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p.193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보고 있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공유했더라도.. 내가 보는 것과 네가 보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기억의 취약성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 순간 같은 것을 보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에겐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40년 전, 1977년 대학 신입생 기숙사에서 처음 만나 그런대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기숙사를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어렵게 취직한 광고 회사 출판부에서 다시 이어졌다, 직장을 옮기며 연락이 끊어졌다가 어느 카페의 개업식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 카페의 단골들과 어울리던 그룹으로 이어지며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그다지 유명해지지는 못했지만 여덟 권의 책을 낸 소설가가 되었고, 동시에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의 기숙사 시절을 <지금은 없는 공주들을 위하여>라는 이름의 소설로 발표한 적이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내면서도 그녀의 책을 산 적도 읽은 적도 없었던 나는 그 책을 주문해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본 세상이 자신이 본 것도 너무나 달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소설에 묘사된 스무 살의 내 모습 또한 너무도 낯설었다. 너무도 다른 그녀의 기억과 나의 기억은 그렇게 과거 속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과거의 내가 나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의 나도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란 누구인가. 내가 알고 있는 내 삶은 실제 내가 살아온 삶과 다른 것인가. 작가는 이 작품에서 1970년대의 문화와 시대상을 세밀하게 서술하면서 갓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공간에서 만나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이런 저런 관계를 맺으며 섞이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2017년을 사는 김유경이 기억하는, 1977년의 공기와 풍경들이 2019년에 책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소환된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에게 있는 자신만의 기억을 되짚고, 과거의 시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시대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더라도,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술과 장미의 나날' 시절의 혼란과 환멸을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p.281~282

책을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로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은 읽어야 하는 기간이 지나면 반납을 해야 했고, 반납하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많은 문장들을 다 외울 수는 없었으므로, 맘에 드는 구절들을 노트에 메모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정말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면 아예 전체 책을 필사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섬세한 어휘들과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들은 나의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렇게 나는 수많은 책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절을 흘려 보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 단락을 만들고, 그 단락들을 이어 하나의 글이 만들어 질 때마다, 시시해 보이는 나의 일상들이 근사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시절 가장 많이 내 손을 탔던 책이 바로 은희경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당시에 나는 구할 수 있는 그녀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아름다운 문장들과 예리한 표현들은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었다. 소설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서만은 그 인물들이 모두 다 '진짜'처럼 느껴졌었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오랜만에 책장 구석에 꽂혀 있는 '타인에게 말 걸기' 책을 꺼내 보았다. 무려 17년 전에 구입했던 책인데, 당시에 얼마나 여러 번 읽었던지 까맣게 손 때가 타서 낡은 책이다. 요즘은 아무리 좋은 책도 두 세 번 이상은 읽을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손 때가 탈 때까지 읽게 되는 경우란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도 대여해서 읽고 또 읽다가, 결국에는 용돈을 모아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던 작가가 여전한 필력으로 신작을 발표하고 있어 독자로서 마음이 뿌듯하다. 은희경 작가가 <태연한 인생> 이후 7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 역시나 오래 전 그녀의 작품을 읽으며 밤잠을 설쳤던 그때만큼이나 설레이는 기분으로 읽었다. 살면서 가끔 생각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 결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나를 누구라고 알고 살아 왔던 것일까.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을 때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을 꺼내어 페이지 속으로 숨곤 했다. 책 속의 어떤 문장에서 오래 전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느 행간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극중의 그녀처럼 기울고 스러져갈 청춘이 한 순간 머물렀던 날카로운 환한 빛을 향해 손을 뻗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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