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권에 환상을 갖지 마요. 인권이라는 게 사실 나쁜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거든요? 완전 쓰레기 같은 놈들, 사회악들이 살맛 나는 인권세상을 만들어온 거 몰라요?"

간이벽으로 구역을 나눈 옆 회의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남자치고는 가느다란 고음에 잔뜩 뻐기는 목소리였다. 호응해주는 몇몇 청중과 함께 있는 모양인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한바탕 들렸다.   p.77

국내 자동차업계 연매출 1위 기업인 오성자동차노조 간부가 여자 조합원을 성희롱했다는 보도가 인터넷에 쫙 깔린다. 오성자동차노조는 파업을 예고한 채, 사측과 단체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성적인 파문만큼 도덕성에 직격탄을 날리는 이슈는 없을 것이다. 선정적이고, 눈길을 끌고, 싸잡아 비난하기 좋으니 말이다. 그리고 성희롱 사건은 인권위가 하는 수많은 업무 중 하나에 속했다. 그렇다면 인권증진위원회, 줄여서 인권위란 무엇인가.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에 대한 진정을 접수하고 조사하여 구제조치를 권고하는 독립적인 국가기관이다. 그 자체가 국가기관이면서 다른 국가기관을 감시하고 조사하는 독립기관으로 유엔 같은 국제인권기구와 개별 국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조직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인권증진위원회 조사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경찰도, 탐정도 아닌, 다소 생소한 직업이지만, 인권침해와 차별행위를 다루는 준사법기관의 공무원들이라 공권력을 동원할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주요 멤버는 이렇다. 매사에 너무 신중한 나머지 누가 봐도 뻔한 사건의 사실관계를 계속 곱씹는 우유부단함에 강단도 배짱도 없는 소심쟁이지만, 경찰사건 조사관으로 일한 지 겨우 1년 남짓 만에 '베테랑' 이라고 평가 받을 정도로 뛰어난 조사관 윤서, 남의 일도 내 일처럼 여기며 감정 이입하는 열혈 아줌마 조사관 달숙,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독단과 정의 사이를 오가는 다혈질 성격의 홍태, 사법고시 출신으로 변호사 특채 사무관으로 인권위에 입사했지만 조사관들 사이에선 영 푸대접을 받고 있는 지훈. 이 작품은 이렇게 성격도, 사고방식도, 조사 스타일도 너무 다른 이들 네 명의 성실하고 공정한 다섯 건의 사건 기록을 담고 있다.

 

사실 인권 조사관이라는 역할이 윤서는 늘 두려웠다. 빨리 다른 일을 찾고 싶었다. 이 일은 지금 옆에 있는 배홍태 같은 사람이 더 잘 맞았다. 국가가 너무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남용해왔던 시절부터 쌓인 힘과 관행 때문에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거라면,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반대쪽으로 기울어진 힘의 의지가 필요한 것 아닐까. 이왕이면 약자의 편, 국민의 편을 들어주는 독단과 배짱이 인권위에 필요한 균형 감각이 아닐까. 중립을 표방하는 소심한 논리는 기울어진 미끄럼틀의 가운데에 안전하게 머물겠다는 비겁한 태도가 아닐까.    p.179~180

검은숲 독서클럽 3주차 도서로 만나게 된 작품은 곧 드라마로 방송될 예정인 송시우 작가의 <달리는 조사관> 이다. 이 작품은 추리 소설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경찰도 탐정도 아니고, 변호사나 법 관련 종사자도 아닌, 다소 생소한 직업인인권증진위원회 조사관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런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거나, 알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지는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일테니 말이다. 송시우 작가의 첫 작품 <라일락 붉게 피는 집>을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기대가 되었다. 이 작품은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황금가지, 2012)에서 선보인 바 있는 단편소설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를 개작, 이야기를 확장한 소설집인데, 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과 현실성 있는 이야기들로 시리즈로서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라마 속에선 냉정하리만큼 중립을 유지하는 캐릭터 한윤서 역을 이요원 배우가 한다고 하는데, 이미지만으로도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 궁금해진다. 그녀와 정반대 성격으로 등장하는 다혈질 배홍태 역의 최귀화 배우도 캐릭터의 매력을 잘 살려주실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가 침해되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대목은 이들 인권위의 조사관들은 유죄냐 무죄냐를 판단하거나, 범인을 단죄하지 않고, 그저 그 과정에서 절차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었는지 만을 살펴본 뒤 보고서를 작성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이다.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숨겨진 진실을 밝혀 낼 수도 있고, 국가권력에 대한 분노와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 앞서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오는 딜레마와 인물들이 빚어내는 갈등이 이 작품의 재미를 더해주고, 바로 그러한 부분들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정의의 실현 방식과 그 본질에 대해서 독자들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서 다음 주부터 OCN에서 방송될 드라마도 챙겨 볼까 한다. 드라마는 16부작이니 소설에서 만났던 이야기 외에 다른 스토리는 어떨지, 인물들은 어떤 모습으로 화면을 채워줄 지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