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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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 물고기, ,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올라이는 생각한다     p.15~16

노르웨이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서 늙은 어부 요한네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아내가 죽은 후로는 마치 모든 온기가 그녀와 더불어 떠나버린 듯 집안이 너무도 썰렁해졌다. 온종일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을 테니, 서쪽 만으로 산책이나 가볼까, 날씨가 그리 궂지 않으면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로 나가 낚시를 조금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역시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그는 커피 물을 끓이고, 빵을 썰어 버터를 듬뿍 바르고는 브라운 치즈를 두툼하게 잘라낸다. 늘 먹던 음식인데, 도통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어쩐지 원래 그대로이면서 전혀 다른' 아침이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여느 날처럼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날은 '뭔가 여느 때와 사뭇 다른, 모든 것이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른' 날이기도 하다.

현재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서 왕성하게 활동중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2000년 발표한 소설이다. 고독하고 황량한 피오르를 배경으로 평범한 어부가 태어나고 또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꾸밈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의 시작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어부인 올라이는 늙은 산파 안나에게 말한다. '사내아이라면, 요한네스라고 부를 겁니다'라고. 그에겐 딸이 있었지만 아내인 마르타는 그 뒤 다시는 태기를 보이지 않았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 갔다. 신이 더 이상 그들에게 아이를 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침내 그녀가 아들을 낳으려 하는 중이다. 그는 생각한다. '이번에는 아들이 확실해, 확실치 않은 건 단지, 아이가 살아서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인가 하는 것뿐, 이 험한 세상에, 문제는 그것뿐이다'라고. 그리고 잘생긴 사내아이가 태어나고,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 아기 요한네스의 탄생을 담고 있는 짧은 서두가 지나 다음 장에 이르면 요한네스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 있다. 요한네스는 아내와 일곱 남매를 두었고, 그들도 각자 결혼해서 손주도 여럿이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의 하루가 막 시작된 참이다.

자 기운 내라고, 그가 말한다.

할 수 있어, 그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선 채로 고개를 끄덕일 뿐 더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가만히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자 페테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역시 늙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야, 요한네스가 말한다.    p.73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등장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며,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이야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시종일관 눈을 뗄 수가 없는 마법 같은 작품이었다. 욘 포세는 연극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로 국내에도 희곡들만 출간되어 있다. 최근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는 그는 희곡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입센 다음으로 가장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서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끌고 있으며, 언어가 아닌 언어 사이, 그 침묵과 공백의 공간을 파고드는 실험적 형식으로 ‘21세기 베케트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짧은 페이지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극의 독백처럼 천천히 읽히며, 한 사람의 생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담백하게 쓰여 있어 쉼표와 쉼표 사이 여백이 깊이 있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마침표 없이 띄어쓰기와 쉼표로 이어지는 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작가 특유의 리듬이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어 어느 순간 그 나직하고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게 된다.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어쩐지 모든 것이 다르면서 여느 때와 같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 라는 문장으로 이야기 전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하고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경쾌하고, 쉬우면서도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단순한 언어로 만들어낸 가장 심오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터넷 서점의 별점 방식을 별로 선호하진 않지만, 이 작품은 별점 다섯 개를 줘도 뭔가 부족하다는 기분이 든다. 별점 다섯 개 이상 주고 싶은, 수십 권 구매해서 주변에 선물해주고 싶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여러 번 필사하고, 문장들을 모조리 외우고 싶은 그런 작품이다. 올해 단 한 권의 책만 읽어야 한다면 무조건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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