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별이 내리는 밤
메이브 빈치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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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져요." 마음이 진정되자 피오나는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이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나도 그래요." 토머스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공유하는 특권을 누린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벅차서 뭐라 말하지도 못했다.

그 순간 예상 밖의 맑은 목소리로 피오나가 말했다. "저 별들이 아테네에도, 우리의 고향집에도 비치고 있겠죠. 모두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그들은 짐작이나 할까요."     p.163~164

지중해 푸른 바다의 빛깔을 닮은 곳 그리스, 아테네의 고대유물과 산토리니의 그림 같은 풍경, 크레타의 아름다운 카페, 미코노스의 슈퍼파라다이스 비치 등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곳들이 가득한 나라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곳 그리스의 작은 바닷가 마을 아기아안나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아기아안나는 낭떠러지 중간에 만든 마을이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눈부신 바다와 항구가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지금 언덕 아래 항구에서 유람선 화재 사고가 발생해 선홍색과 오렌지색 불길이 아기아안나만에 떠 있는 배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푸른 바다 위에서 날름거리는 불길과 검은 연기는 마치 그림 한가운데에 찍어 놓은 그로테스크한 하나의 점처럼 보였다. 언덕 위에 자리한 음식점에서 우연히 함께 끔찍한 비극을 목격하고 있는 이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다들 언덕까지 올라오는 데 세 시간 정도 걸렸을 정도의 거리라 다시 내려간다고 해도 도움이 될만한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냥 설레이고,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할 것 같은 풍경 속에서 예기치 못한 우연으로 커다란 비극을 목격하게 된 여행자들은 그날 어둠이 내리고 별이 하나 둘 떠오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국적도, 나이도, 직업도, 여행을 온 사연과 각자의 고민도 다른 네 명의 여행자는 어제 이맘때까지 만난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모든 문제에 대해 편하게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삶에 관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여행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스의 아름다운 바다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누구나 할 법한 고민을 품고 있는 인물들의 삶을 보여 주면서 다정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소소하지만 그래서 더욱 공감이 가는, 내 주변 누군가에게는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지는 그런 고민들이 여행이라는 비일상성이 주는 묘한 설레임과 만나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그런 게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행운을 바라는 그 모든 사람들을 봐요. 복권을 사는 사람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그 많은 사람들, 별자리점을 보는 숱한 사람들, 네잎클로버를 찾으려고 하거나 사다리 밑으로 지나가지 않는 사람들 말이에요. 다 소용없는 거예요, 안 그런가요?"

"하지만 사람들에겐 희망이 필요해요." 피오나가 말했다.

"물론 필요하죠. 하지만 우리의 행운은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일이 잘될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결정은 우리가 내리는 거죠. 앞에 검은 고양이가 지나간다거나 전갈자리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바깥에서 작용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p.307

독일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던 엘자는 방송국 대표와 사귀다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깨닫고 직장을 그만 뒀다. 그리고 남겨 두고 온 어떤 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며, 장기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미국 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토머스는 안식년을 맞아 일 년간의 여행을 계획했다. 사실 이혼한 아내가 재혼을 하게 되어, 전처와 아들이 조금 더 편하게 새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아일랜드의 간호사인 피오나는 남자친구를 반대하는 가족들로부터 도망쳐 그와 함께 여행 중이었다. 문제는 함께 여행 중인 남자친구 셰인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는 것과 그녀 만이 그런 그를 굳게 믿고 있다는 거였다. 영국인 청년 데이비드는 오직 사업과 돈 버는 데만 관심 있는 부모로부터 도망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세계여행 중이었다. 이렇게 너무 다른 네 여행자와 이곳의 마을 사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각자의 삶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그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는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해나간다.

작년 겨울에 <그 겨울의 일주일>이라는 작품으로 마음 시린 계절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야기를 보여주었던 작가 메이브 빈치가 이번에는 눈부신 여름 풍경 같은 작품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리며 인물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토닥이며 위로해주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그 마음이 페이지마다 느껴지는 작품이다. 누구나 살면서 삶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이 작품 속 네 명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선택하는 순간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도, 선택을 번복할 수도, 취소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인생이고, 그럴 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선택은 달라질 수도 있다. 누구도 혼자여서는 안 되는 밤, 서로의 곁을 지켜준 네 여행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 여름밤이 선사하는 마법 같은 시간을 경험해 보자. 그리고 당신 곁에는 누가 있는지 떠올려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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