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나의 집 모중석 스릴러 클럽 46
정 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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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타당한 요구였다. 그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 지극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를 속박하고 있는 지구 반대편에서는 무조건 부모가 우선이다. 아이는 두 번째, 그리고 아내는 맨 마지막. 매와 진은 그를 그렇게 키웠다. 그는 그런 부모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렇다고 질리언에게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p.133~134

며칠 전 낮에 아랫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한참 들린 적이 있다. 보통 어른이 곁에 있을 테고, 아기가 뭔가 불편한 게 있어서 울거나 칭얼댄다면 금방 달려가서 해결해 주지 않을까. 물론 그럼에도 아이의 요구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아이를 조금 길게 울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겠지만, 참 이상하다 싶게 아기 울음소리가 길게 들렸다. 순간 생각했다. 설마 아기만 남겨두고 어른이 자리를 비운 건가? 혹시 아기를 학대하는 부모가 있는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급기야 아래층에 내려가볼까 하던 차에 아기 울음 소리가 그쳤다. 세상이 험악해지고, 뉴스에선 연일 끔찍한 소식을 사건사고로 보도하고.. 그러다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굳게 닫힌 대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오싹했다.

대부분 가정 범죄는 집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나 동료들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범죄자들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시무시했다. 정윤의 첫 소설 <안전한 나의 집>에 등장하는 가족들 역시 그러했다. 크고, 튼튼해 보이는 대문이 그려진 표지를 열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가족이라는 허울뿐인 이름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7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와 보란 듯이 성공한 아버지, 아버지처럼 교수가 된 아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히 성공한 재미한인 가족이다. 그러다 그들에게 즐겁고 안전해야 하는 집은 문이 닫히면 지옥으로 변하는 곳이다.

그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린 나이에 한국에서 이민을 왔다. 그런데 그들의 사고방식은 누가 봐도 한국식이다. 여자들은 전부 남편과 아버지와 시부모에게 복종한다. 지금도 분주히 음식을 나르는 건 여자들뿐이고, 그 중에도 며느리들은 가장 눈에 띈다. 며느리들은 항상 필사적으로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때문이다....그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어머니처럼 결혼과 함께 종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질리언도 일 년에 몇 차례 시부모 앞에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한국인 아내들은 평생을 그러고 살아야 한다.    p.174

부모에게 반발해 백인 여자 질리언과 결혼한 경, 그들은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다 결국 집을 내놓으려고 공인중개사를 만난다. 학자금 대출과 주택 담보 대출이 경의 발목을 잡으면서 빚이 불어나고 카드 돌려 막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집값이 폭락해 대출금조차 보전이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을 때, 집 뒤뜰에 알몸인 여자가 다리를 절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경의 어머니인 매였고, 아들을 보자마자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한다. "도와줘." 그리고 "아버지가 다치셨어." 하지만 한국말이 서툰 경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해치려 했다, 다치게 했다는 식으로 알아 듣는다. 어머니의 몸은 찰과상과 핏자국, 멍으로 뒤덮여 있었다. 경의 아버지는 십 수 년 전까지 어머니를 무자비하게 때렸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경찰과 함께 부모의 집을 찾은 경은, 강도가 들어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아버지는 무차별 폭행을 당했으며, 어머니와 가정부는 그들에게 강간당했다는 알게 된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경은 그런 일을 겪은 부모를 당분간 자신이 돌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강도가 들어 그들이 당한 그 일만큼이나 경에게 끔찍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는 아들을 때렸다. 어머니인 매는 미국으로 와서 친구도, 일자리도 없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고, 그녀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던 것은 어린 아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들 가족은 그렇게 유지되었다. 어린 경은 어머니가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화풀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했다. 하지만 왜 어머니가 집에서 나갈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자신을 데리고 탈출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원망했다. 아버지 진은 미국에서 사회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가족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밖에서와 달리 집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경은 오랜 시간 증오했던 부모를 집으로 모셔와 자신의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지내도록 해야 한다. 각기 다른 사고방식과 신념으로 살아온 3대가 한 지붕 아래 모이면서 시작되는 진짜 비극은 서늘하고, 오싹하다.

작가는 경의 부모에게 벌어진 끔찍한 범죄라는 미스터리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한인사회,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미국인이지만 사고방식만은 지극히 '한국적'인 해외 교포 1.5세들의 이야기를 함께 배치해 스토리를 풀어 나간다. 작가인 정윤 역시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재미한인이고, 이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 역시 그러하다. 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모순과 즐겁고 안전해야 할 집에서 벌어지는 가정폭력이라는 아이러니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참 아프고 슬프면서도, 오싹하고 서늘한 작품이다. 당신의 집은, 당신의 가족은 안전한가. 굳게 닫힌 문 뒤에서 벌어지는 이런 비극을 우리는 더 이상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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