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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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전체를 사유하는 데 헌신하며, 결과적으로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 가운데 하나만을 독점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부상시키는 전문가의 삶의 방식이나 철학자의 초연한 태도는 보통 사람들의 공통감에는 "죽은 사람을 모방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소멸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경험이나 현상세계로부터의 이탈을 죽음으로 이해하는 세계 안에서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자살을 희망하지 않고도 이러한 삶의 방식을 신중하게 선택한 사람들은 적어도 파르메니데스 이후 언제나 존재해왔다.    p.30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평생에 걸쳐 사유에 관해 탐구한 내용을 생의 말년에 집필한 책으로, 아렌트가 자신의 저작물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긴 그의 마지막 저서다. 1977년과 197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사유> <의지>가 모두 수록되어 있는 통합본으로, 당시 출간되지 못한 <판단>은 발췌본으로 후반부에 수록되어 있다. 사유와 의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판단을 부분적으로 소개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사실 그는 '판단' 집필을 시작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았기에, 아쉽게도 그의 강의 자료를 정리해 출간한 '칸트 정치철학 강의' '판단'으로 대신해 읽어야 한다.

묵직한 그 배경처럼 분량부터 칠백 페이지가 넘는데, 그 압도적인 페이지만큼이나 내용도 만만치가 않은 책이다.  정신의 삶을 구성하는 사유 자체를 탐구하는 이 책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 활동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세 가지의 정신 활동으로 분류해 조명한다. 사유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아렌트는 독자들이 '정신의 삶' 3부작을 많이 읽기를 기대했다. 그의 이전 저서들은 '정신의 삶' 집필을 위한 준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스로에게 중요한 저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그 동인들 가운데 하나인 가능태를 선행해야 한다는 견해는 확실한 시제로서 미래를 암묵적으로 부정한다. 미래는 단지 과거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자연적 사물과 인위적 사물 사이의 차이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필연적으로 발전하는 것들과 실재화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들 사이의 단순한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기억이 과거를 위한 기관이듯이 미래를 위한 기관으로서 의지라는 개념도 전적으로 부차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지의 존재를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p.345

우리는 매일 생각하고 의지하고 판단하며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삶이란 무엇인가? 사유, 의지, 판단은 어떤 활동인가? 정신의 삶은 일상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등의 질문에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고 말이다. 특히나 아렌트는 철학을 구름 위에서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삶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더 실질적인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물론 생각보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최소 서너 번은 완독해야 아주 조금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겨우 한번 읽어 본 걸로는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2016~2017년 촛불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시민불복종운동과 혁명을 현상학적 방법으로 규정해 낸 한나 아렌트의 개념들이 신문 등 보도 매체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현재 왜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한나 아렌트의 여러 사상과 개념들은 그 외 정치 보도에서도 숱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통해 인간 활동의 다양한 의미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었고, 그의 정치철학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 이 책의 후반부에는 역자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많은 옮긴이 주를 달았고, 해제논문도 수록해 전반적 구도와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역자의 말처럼 '난해한 내용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그 의미를 깨달았을 때 느꼈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읽기를 시도하는 독자들에게 그렇게 특별한 기쁨을 안겨 줄 것이다. 물론 읽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고달프고, 읽으면서도 이해가 안 되거나 어렵고, 읽고 나서도 내가 대체 뭘 읽은 건가 싶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재독이다. 이 책은 두 번, 세 번... 여러 번 읽을 수록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곧바로 첫 페이지를 다시 펼치고 재독에 들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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