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거짓말을 해버린 시점에 당신은 이미 이 게임에서 이긴
거였어요."
“네, 당신의 범행은 완벽했어요. 쓸데없는 말을 지어내지도
않았고, 오히려 최대한
거짓말을 줄이려고 연구했지요. 우리는 아무리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어도 결정타가 없으면 손을 쓸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약점을 찌른 거예요. 당신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짓말을 딱 한 개만 더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p.53
얼마 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나오코에게 가가 형사가 찾아온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준 사진 속에는 나오코 부부의 집을 담당했던 건축사 나카세의 얼굴이 있었다. 실은 일주일 전부터 그가 행방불명이어서 수사
중이라는 얘기였다. 나오코는
그저 단순한 고객이었을 뿐 개인적으로는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지만,
어쩐 일인지 가가 형사는 나카세의 행방불명에 대해 뭔가 짚이는 게 있지는 않은지 연락이 온 적은
없는지를 묻는다. 자신은 전혀
모르겠다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나오코는 가가 형사가 집을 떠나자 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만다. 죽은 남편과 남겨진 아내, 그리고 행방불명된 한 남자. 이들 세 사람 사이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 작품은 '가가 형사 시리즈'의 유일한 단편집으로 표제작을
비롯해서 <차가운
작열>, <두 번째
꿈>, <어그러진
계산>, <친구의
조언> 이렇게 다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짚어 내고 있으며,
짧은 분량 속에서도 반전과 트릭 등 추리소설적인 재미는 놓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단편이라는 특성 상 가가 형사와 범인과의
심리전이 주요 플롯이 되는데, 사건 자체의 미스터리보다 속이고,
감추고,
그 거짓말을 드러나게 만드는 가가 형사만의 번뜩이는 재치와 예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이야기들이었다.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나는 거라고
생각하면 나오코는 암울한 기분이 되었다. 아직 아이도 없고 삶의 보람이랄 것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자기 멋대로 구는 어린아이가 그대로 어른이 된 듯한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하루하루였다. 2년 전에 다카마사가 오래도록 염원하던 단독 주택을 마련했을 때조차도 전혀 신이 나지 않았다. 신축 건물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집에 첫발을
들였을 때, 처음으로 그녀가
생각한 것은 이곳이 내가 죽을 자리인가, 라는 것이었다.
p.194~195
발레 공연을 앞두고 있는 공연장에
찾아온 가가 형사는 의문의 추락사건을 수사 중이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목숨처럼 소중히 지니고 살아온 발레리나에게 그가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이유는 뭘까. 욕실에서 발견된
아내의 시체, 그리고 돌이 된
아들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작품은 파친코 도박에 빠져서 아이를 자동차 안에 방치해 죽게 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쓰였다고 한다. 두 모녀가 사는 집에서 엄마의 애인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실현하려는 엄마와 딸이 등장하는 누구나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사회적 명성이라는 허상, 붕괴되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 무감성의 젊은 세대 등 사회적인 문제점들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이라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번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가 국내 출간 10여 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개정판에서는 10여 년 전 자신의 번역을 대대적으로 수정,
보완했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뀐 한글어문규정을 적용하고 기존 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를 바로잡은 것은
물론, 권 별로 문장
전체를 3,000군데 이상
다듬어 읽는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아울러 각 권에 대한 기발한 해석이 빛나는 그림작가 최환욱의 표지화로 시리즈로서의 통일성을
더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개정판이 출간된 덕분에, 이 작품을 정말 오랜 만에 다시 읽었는데,
곧 가가 형사 시리즈 열 번째 작품이 출간되려는 시점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전체 열 편이고, 이번에
개정판으로 출시된 '가가 형사
시리즈'는 ‘가가
형사’의 대학 시절부터 네리마
경찰서 소속 형사 시기까지를 다룬 일곱 편의 작품들이다.
가가 형사’는 시리즈 캐릭터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히가시노가
이례적으로 30년 가까이
애정을 쏟으면서 성장시킨 인물로, 작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이자 그의 페르소나라고 불리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이 시리즈를 다시 한번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