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머묾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살아낸거니 그럴 거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선배는 그렇게 '자신이 읽은 문장이 아닌 산 문장'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누군가 오래 쓴 문장을 알아보고 그 문장의 바깥을 짐작하며, 그 둘레에 자기 이야기를 입혀 설명한다. 어떤 단어를 눈으로 본 뒤 다음 사람에게 그걸 몸짓으로 설명하는 개그맨처럼 능청을 떨며 그런다. 그러니까 이 책에 묶인 모든 글은 작가가 두 번 쓴 독후감이다. 한 번은 눈과 마음으로 다른 한 번은 몸과 시간으로.    p.141~142

김애란 작가의 첫 산문집이다. 그녀가 2002년 등단한 이후 17년 여 동안 기록해온 원고들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작가가 되어 동료 문인들과의 이야기와 그녀의 일상들이 모두 담겨 있어 소설가로서의 삶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삶 전체를 만나는 듯한 기분도 드는 책이다. 세상에 잊어야 한다거나 잊어도 되는, '잊기 좋은' 이름은 없지만,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잊어 버리고 산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유독 잊을 수밖에 없었던 이름, 결국 잊을 수 없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여러 장소에서 살았지만, 그 공간들이 순전히 이야기의 형태로 내 몸에 남아 있다,라고 시작하는 첫 번째 이야기부터 아스라히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어머니가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았던 '맛나당', 그리고 그 국숫집에서 그들 가족은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았다고 한다. 당연히 구매도 학습도 불가능한 유년의 정서가, 그곳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렇게 장사한 돈으로 세 딸의 학비와 방세, 생활비를 모두 댔다고 한다. 글을 읽다 보니 내 어린 시절의 장소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임대 아파트에 살다가 처음으로 집을 장만했던 순간, 모델하우스라는 곳에서 세련된 인테리어들을 보며 설레었던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내게도 쌓여 있었으니 말이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러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 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p.252

처음으로 등단 소식을 들었던 대학교 컴퓨터실의 기억, 고려대학교 근처 헌책방에서 구했던 '언어학사'라는 책에 대한 단상, 동료 작가들과의 에피소드, 겉보기와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편혜영 작가에 대한 이야기,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었던 서른다섯의 어느 날 등등... 담백하지만 뭉클하고, 따스하지만 예리하게 현실을 짚어 내는 김애란다운 글들 속에서 나는 문득문득 나를 발견하고, 내 시간을 돌아보았다.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와는 그 어떤 교집합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나는 그녀의 글들 속에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뜨겁게, 현재와 과거를,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잇는 선을 천천히 따라가 보는 중이다.

 

김애란 작가가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지나온 내 시간 속을 잠시 들여다 본다. 나를 스쳐 지나온 사람들, 내가 잊어 버린 이름들과 그 속에서도 나에게 남아 있는 기억들을 가만히 응시해본다. 바람이 부는 창문의 표지 이미지처럼, 내 속에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역시 그녀처럼 이 책 속 문장들을 읽으면서 그 문장 안에서 잠시 살다 온 듯한 기분이다. 그녀가 쓴 문장의 바깥을 짐작하며, 그 속에서 내 이야기를 통과시켜 읽어 본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던 그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