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문의 비극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5
고사카이 후보쿠 외 지음, 엄인경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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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렇게 물어보면 자네도 대답하기 망설여질 텐데, 요즘 민중의 힘이라는 것이 자주 주장되지만, 적어도 과학 영역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몇 만 명 있은들 한 사람의 천재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자네는 인정할 걸세"

"인정합니다."

"그러면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인 이상 과학적 천재가 벌인 일이 비인도적일지라도 자네는 그것을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p.60

2천 평도 더 되는 넓은 정원을 소유하고, 한눈에도 돈을 상당히 들인 것임을 알 수 있는 서양식 저택에서 거액 자산가가 권총으로 피격되었다. 이 저택에는 피해자인 주인 고헤이, 이혼 후 친정으로 돌아온 여동생 아오시마 가쓰에, 그리고 들어온 지 반년 정도 되는 하녀 야마시로 유코, 일한 지 겨우 4일째인 이토 쿄코, 이렇게 딱 네 명이 살았다. 다카기 가문의 자산은 대략 천만 정도, 원래 자작 신분을 내세웠는데, 고헤이의 아버지 대 그 작위를 박탈당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고헤이는 자신의 방에는 사치를 부려 놓았으면서 여동생과 하녀들의 방은 마치 거지의 집처럼 초라하게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고헤이의 아내는 8년 전에 미쳐서 자살했고, 그것도 고헤이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서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권총이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타살임이 분명했는데, 유력한 용의자이자 그의 유산 상속인인 네 명에게는 범행시각인 3시에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다.

 

여동생, 사촌 동생, 조카, 아들.. 네 사람 모두 고헤이를 미워했다고 한다. 그들 모두 기회만 있었다면 그를 죽였을 거라고 하니, 동기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고헤이 자신도 이들 네 사람을 증오했고, 네 명 중 누군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죽은 뒤 막대한 유산을 그들 넷에게 분할 양도할 것을 유언장에 명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묘한 단서를 달았다. '나를 살해하고, 또는 살해하려고 계획하거나 혹은 그러한 혐의가 인정되는 자는 다음의 권리를 상실한다' 라고. 이 무슨 기묘하기 짝이 없는 일족이란 말이다. 마치 미치광이와 범죄자 집합과도 같았다. 가가미 과장은 사건의 핵심이 다카기 가문의 역사 안에 있는 비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수사를 해 나간다. 이 작품은 본격 추리물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쓰노다 기쿠오의 <어느 가문의 비극>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 무슨 이상한 분위기인지. 가가미는 이 건물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은 순간에 이미 그것을 알아차렸는데, 그것은 살인 현장이라는 조건을 제외하더라도 그 전에 이미 이 건물 안에 배어 있는 듯한 이상함이었다.

여기 살고 있는 인간의 광기 어린 기묘한 무언가 어느새 건물벽이나 가구에 배어들어 버린 - 만약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이 저택이야말로 분명 그런 사례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가가미는 복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p.251

얼마 전에 <유리병 속 지옥>이라는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시리즈가 일본 추리소설의 원류를 이해하고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오래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치하다거나 고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는 1880년대 후반 일본에 처음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되었을 당시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주요 추리소설을 엄선하여 연대순으로 기획한 시리즈이다. 이번에 만난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은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무대로 쇼와 시대 초기에 창작분야에서 활발히 활약한 추리소설 작가 네 명의 여섯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에도가와 란포의 스승인 고사카이 후보쿠, 란포와 더불어 당시 탐정문단의 3대 거성으로 일컬어진 고가 사부로와 오시타 우다루, 그리고 일본 쇼와 시대의 매력적인 명탐정 '가가미 게이스케'를 창조한 쓰노다 기쿠오, 이렇게 네 명의 작가들이 저마다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사카이 후보쿠의 두 작품이 분량을 짧았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작가가 의학부 출신이고 생리학자이자 법의학자로 명망이 높았기에 과학적 이성의 냉철함과 작가로서의 분방한 상상력이 만난 작품을 그려낸 게 아닐까 싶다. 과학자가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한다는 설정과 연애라는 감정의 극치를 심장의 혈류를 통해 연애 곡선으로 만들어 보인다는 정말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놀라웠다. 게다가 실연의 비통함이 극에 달한 과학자가 선택한 마지막 실험이란 매우 충격적인 결말로 이어져 인상적인 여운을 남겨 준다. 나름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일본의 초창기 추리 소설들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를 통해서 처음 만나게 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아마도 현대의 미스터리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 하면,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밖에 몰랐다면, 그들의 작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과학과 추리가 절묘하게 만나고, 본격과 변격이 투쟁하는 추리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통해 그 기발한 내용과 독특한 형식에 놀라고, 현대의 익숙한 추리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색다른 재미를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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