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년기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사회에 사는 사람 중에 유년기를 이해하고 가치 있게 여기고 심지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좋아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은 참으로 행운아이다. 노년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아이들은 늙음을 두려워하게 되고 어쩌다 운이 따라야만 노인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발견한다... 그냥 척척 해내던 일상생활, 하는 줄도 모르고 늘 해왔던 너무나 쉬운 일들이 노년이 되면서 점차 어려워지더니 결국은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진정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온다. 노년은 대개 고통과 위험, 사망이라는 불가피한 종말을 수반한다. 그걸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존경받아 마땅한 용기이다.   P.31~32

하루에 알람을 열 개는 맞춰 두고, 그때 그때 필요한 일들을 해치우며 살고 있는 내게 언제나 시간은 쫓아가기 바쁜 것이었다. 그래서 여든을 넘긴 노년의 작가가 생애 마지막 에세이를 써내며 '내게는 남겨둘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이 책이 너무도 뭉클하게 다가왔다. 이 책을 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남는 시간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내 시간은 전부 할 일로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노작가의 푸념이, 어쩐지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의 거장인 작가의 삶과 평범한 독자인 내 삶을 감히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어슐러 르 귄이 2010년부터 5년 동안 블로그를 통해 남긴 글 40여 편을 담고 있다. 책이 2017 12월 출간되고 나서, 작가는 2018 1 22 8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찾아 오게 마련이지만, 그러한 육체적인 노화가 스러져감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존 스타인벡과의 에피소드, 미국의 도덕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적인 비유, 흥미로운 독자들의 편지와 욕설 문화에 관한 노작가의 세심하고 담백한 유머, 늙음과 삶에 대한 사려 깊은 사색들이 예리하면서도 편안하게 펼쳐진다.

내가 어릴 때 다른 아이들이 '산타의 진실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불신은 사랑받지 못하는 법이니까. 지금 이렇게 입을 열어 말하는 이유는 사랑 받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 어른들이! - 산타클로스가 진짜가 아님을 알게 된 끔찍한 날을 애도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여전히 반신반의한다. 내가 끔찍하게 여기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의 상실'이다. 아이들에게 거짓을 믿으라거나 믿는 척하라고 요구하는 처사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P.291~292

노년의 삶과 현대의 문학 산업 등에 관한 글들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르 귄의 마지막 반려묘 파드와의 에피소드들이었다. '파드 연대기'라고 해서 파드와의 만남과 소소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대목이 세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영리하고 모험을 즐기며 고집이 센 파드와의 첫 만남부터 소소한 일상들, 그리고 인간과 동물 간의 조화에 대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여타의 고양이가 등장하는 에세이와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라 더 좋았다. 가볍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주제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지만 결코 무겁지만은 않는 느낌이랄까. 세상을 오래 살아온 그 시간만큼의 사유와 고뇌와 혜안이 모두 드러나 있는 그런 글들이었다.

글쓰기는 그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입찰이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오독되고 오해 받고 오역되더라도, 그저 운에 맡겨야 한다. 내가 아이들의 팬레터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판타지 소설의 기본이 되는 전쟁과 여행 이야기가 모두 호머의 저서 두 권에 들어 있다. 위대한 미국 문학을 쓰고자 하는 작가라면 반드시 스스로를 다른 작가들과 동등한 입장에 놓아야 한다. 예술은 경마가 아니며, 문학은 올림픽이 아니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판타지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등등.. 개인적으로 2장 문학 산업에 대한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르 귄의 판타지 소설들을 좋아했던 독자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테지만 말이다. '우리가 태어난 날과 마지막 날 사이에, 말들의 삶에서부터 별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연 2019-07-2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보관함에 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