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병 속 지옥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6
유메노 큐사쿠 지음, 이현희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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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천지에 이런 기묘한 집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기묘한 일들로 가득하고 하나하나가 악몽보다 더 오싹하고, 두렵고, 기쁘고, 슬펐다... 저 화려한 화장실, 어쩐지 으스스한 병실, 가죽 채찍, '기괴한 북' - 어쩌면 이렇게도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있을 수 있는가. 어쩌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집이 있단 말인가. 내 눈으로 분명히 보았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다 -.    p.48~49

악기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큼 사로잡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교토에 기괴한 북이 있었다. 보통 북을 치면 둥 둥 둥 하는 맑은소리가 나는데 비해, 이 북은 음산하고 여음이 없는 두... .. .. 하는 소리가 난다. 이 북소리 때문에 예닐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북을 만드는 장인인 구노는 자신의 거래처 가운데 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갸씨 역시 구노에게 호의적으로 대했으나, 그녀는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었고 당시 숨겨둔 자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재상의 부인이 되었고, 구노는 아가씨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갈 혼수품으로 자신이 만든 북을 선물로 준다. 그리고 그 일가에게 불길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무섭고도 음산하지만 조용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그 북은 '기괴한 북'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구노 자신은 아무런 뜻이 없었다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원망과 저주가 북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하여 그 북을 치거나 북소리를 듣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다. 구노는 이를 알고 죽어가며 누구라도 좋으니 그 북을 되찾아 다시는 북을 치지 못하도록 찢어 버려달라고 유언을 남기지만, 그 누구도 북을 되찾아오려는 자가 없었다. 그 이야기는 전설처럼, 거짓말처럼 세상에 남겨졌고, 세대를 거치고 거쳐 백년 후 구노의 손자, 그의 아들에게로 내려 온다. 영겁으로도 사라지지 않은 원망의 울림, 인간의 힘으로는 지우기 힘든 슬픈 집념, 무간지옥의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죽어도 죽음으로 얻을 수 없는 영혼의 탄식이 담겨 있다는 그 북소리는 또 누구의 마음을 빼앗고, 목숨을 가져갈 것인가. 여름 밤에 읽기에 오싹하면서도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유메노 규사쿠의 1926년 데뷔작인 <기괴한 북>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요상한 것일까요? 이 숲에는 적도 아군도 없고..... 완벽한 허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왠지 안심과 동시에 평상시의 심약한 내 모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습니다. 이런 기분 나쁜, 요괴라도 나올 것 같은 숲 속으로 왜 혼자 온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습니다. 군인답지 않은 성격으로 군인이 되어 초원 한가운데서부터 오랜 시간을 기어와 놓고는 홀로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제 운명을 이제야 절절히 되돌아보고 공포심에 참을 수 없게 되자 지금 당장이라도 숲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p.184

1880년대 후반 일본에 처음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되었을 당시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주요 추리소설을 엄선하여 연대순으로 기획한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작품이다. 가능한 한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하여 번역하고자 했다는 취지에 맞게 이번 작품 역시 다소 낯선 작가이다. 유메노 규사쿠는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지만 일본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1926년에 첫 작품을 낸 이후 1936년에 타계할 때까지 그의 작품 활동 기간은 불과 10여 년에 그쳤지만 이 기간에 그는 에세이를 비롯하여 단편, 중편, 장편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이 책에는 유메노 규사쿠의 작품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1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편지 글 형식과 자백하는 형식으로 서술되는 이야기가 많고,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첫 번째 수록작인 <기괴한 북>도 그러하고 주로 이상한 일을 겪은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해 본인이 겪은 사건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천재, 정신병자, 소년, 소녀 등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그의 작품은 '탐정소설이라기보다 괴기 소설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는 평처럼 추리소설이지만 미스터리보다는 인간 내면의 어둠을 탐구하는 괴기스러운 면이 부각되어 있다. 나름 추리, 미스터리 장르의 책들을 많이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만나게 된 일본의 초창기 추리 소설들을 읽게 되니 굉장히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오래 전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치하다거나 고루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나면서도 그 틀 안에서 멋지게 비틀기를 해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일본 추리소설의 원류를 이해하고 시대별 흐름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이 시리즈만의 매력이지만, 그냥 작품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은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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