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 엄마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에게는 없는
존재와 함께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말이다.
내 삶에 그들의 삶을 덧대어보고는 한다. 사지 않을 옷을 거울 앞에 들고 서서 몸에 대어보듯이. 그러고 나면 잔상이 남는다. 펜으로 눌러쓴 자국이 다음 페이지에까지
남듯이. 그 자국을 손끝으로
훑으며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예쁘기는 참 예쁘던 옷을 떠올리듯이.
결국 삶이란,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의 덧셈이나 뺄셈이 아닐까. 했어야 하는 일과 하지 못한 일의 곱셈이나
나눗셈일지도 모르고.
-'룰루와 랄라' 중에서, p.51~52
언젠가 늦은 밤에 누군가 우리 집
현관의 비밀번호 키를 잘못 누르는 소리를 듣고는 오싹했던 적이 있다.
삑.
삐삐삐삑..
물론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다.
아마도 술에 취해 자신의 집인 줄 착각했던 남자가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고, 희미하게 번호키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나는 혼자 사는 여성이 아니었고, 내가 거주하는 곳도 대부분 가족들이 함께 사는 집들이었지만, 그때 만약 내가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 남자가
집주소를 착각했던 게 아니라 나쁜 마음을 먹고 찾아 왔던 거라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도 무서웠다. 최근 술에 취한 채 낯선 여성의 뒤를 밟아 그 여성이 집에 따라 들어가려고 했던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처럼, 그렇게 혼자 사는 여성들에게 대한민국은 안전한 곳이 아니다.
표제작인 <새벽의 방문자들>에서 여자는 새로 이사 온 오피스텔에서 밤마다
찾아오는 낯선 남자들을 통해 그러한 공포를 경험한다.
다행히도 그들은 주인공 여자에게 딴 마음을 품고 나쁜 짓을 하려 했던 이들은
아니었고, 오피스텔 성매매를
하러 온 남자들이었다. 더블타워 오피스텔은 입구만 다를 뿐,
두 동의 외형과 구조가 같았고, 그래서 주소를 착각해 잘못 찾아온 남자들이 밤마다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러댔던
것이다. 장류진 작가는 이
책에 등장하는 밤의 남자들을 쓰면서, 자신이 실제로 알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좋은 학교를 졸업해,
좋은 직장에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와 아내도 있는 그들은 성매매 경험을 본인의 입으로 공공연히, 자랑처럼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SNS에 화목해 보이는 가족사진을 올리고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이중적인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만약 이 작품을 읽게 된다면 작가에게 연락할 지도 모른다. 이거 설마 내 얘기냐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응.
이거 네 얘기야.
이 글을 읽고 있는 너,
바로 당신."
너도 이제 그만 선배를
이해해줘.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잖아. 하나는
전체를 위한 거지만 전체가 하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지나는 항상 입바른 소리를 지껄인다, 고 보라는 눈을 감고 생각한다. 나는 생래적으로 부친 살해의 욕망조차 박탈되어
있잖아. 민주화에 투신한
부모를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하지만 차라리 아버지를 미워했으면 좋겠다고...아버지는 누구에게나 카프카의 아버지인데 내게는 아버지를 미워할 당위조차 없으니
억울하지 않니? 지나의 말과
함께 창밖 풍경이 빠르게 멀어진다. 우리는 결코 우리일 수 없었다. -'예의 바른
악당' 중에서,
p,188
여자는 직장에서 성추행을 일삼는 상사를
고발했다가 퇴직을 강요 당하고, 싸우기도 지쳐서 그 길로 회사를 나와 버린다.
그리고
5년간 사귄 남자 친구에게 그간의 일들을 말하며 자신의 편을 들어줄 믿음직한 모습을
기대한다. 하지만 얼굴이 벌게
져서 벌떡 일어난 남자의 입에서 나온 건 고작 그 따위 일에 밥벌이를 때려치우다니 지금 제정신이냐는 분노의 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그 따위 일이라니. 저게 날 사랑한다는 연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그렇게 그녀는 실직과
실연을 동시에 겪게 된다. 그런데 그들에겐 결혼과 미래를 꿈꾸며 함께 저축해온 데이트 통장이 있었으니, 통장의 명의는 남자였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이 월세와 공과금으로 다 나가버리고 당장 쌀 살 돈도 궁하게
되어 그에게 내가 부은 액수는 돌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위자료로 받아두겠다며 억울하면 경찰이라도 부르라고 개 풀 뜯는 소리만
해댄다. 전 남친에게 통장도
털리고, 멘탈도
털리고, 직장에선
쫓겨나고.. 그런 상황에서
여자가 저지르는 일탈은 황당할 정도로 파격적이고,
당돌하지만 우리는 그 속에 담겨 있는 함축적인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이 책에는 제각각 다른 상황에 처해 있는
그녀들이 있다. 눈먼 섹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밤마다 찾아오는 남자들의 얼굴을 촬영해 프린트해 두는 여자,
성추행을 일삼는 상사를 고발하고 자발적으로 잘리고 만 여자, 연애라는 이름으로 섹스를 해야 했던 미성년
소녀, 정치적 올바름으로
주장하느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애인과 친구를 떠나는 여자,
선생님들의 추행을 폭로하는 포스트잇을 학교 복도에 붙이는 소녀, 결혼을 꿈꾸며 함께 모은 데이트 통장을 남자에게
털리고 멘탈도 함께 털린 여자 등... 나에게도,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이미 일어났던 그런 일들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불분명한 사건들,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분별하기 어려운 그런
일들을 겪은 그녀들의 삶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분명 픽션으로 그려진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에겐 현실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