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페어 - 사법체계에 숨겨진 불평등을 범죄심리학과 신경과학으로 해부하다
애덤 벤포라도 지음, 강혜정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 모두는 범죄자의 얼굴, 태도, 행동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직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매일 그런 직감을 활용한다. 즉 거스름돈을 셀지 말지, 어떤 사람이 새치기를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귀갓길에 언제 길을 건널지 등을 결정할 때마다 그런 직감을 활용한다. 앞에서 나온 네 명의 뉴질랜드 피고인을 볼 때도 이런 무의식적인 조합이 선택을 이끈다. 정말로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 비록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왜 범죄 행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지 분명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p.87

1979 8 11, 여자의 집에 침입해 여자를 구타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존 제롬 화이트는 유죄 평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사실 물리적 증거는 많지 않았고, 범죄 현장에서 수집한 머리카락과 화이트의 머리카락 사이에는 '충분한 유사성'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이었던 건 피해자가 화이트를 가리키며 "저 남자입니다."라고 자신을 공격한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확인했다는 사실이었다. 증인석에 앉아 피고를 가리키며 바로 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살아 있는 인간보다 설득력 있는 증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는 범인이 아니었고, 2007년 실시한 DNA 검사 결과 화이트는 무죄로 방면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의 거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낸 뒤였다. 조사 당시 피해자는 그가 가해자임을 거의 확신했다. 그녀가 그렇게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더 놀라운 것은 당시 경찰서에서 피해자가 보았던 다섯 명의 남자 중에 진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지목한 화이트가 세 번째 서 있었고, 다섯 번째 서 있었던 제임스 에드워드 퍼햄이 진짜 범인이었다. 물론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흐른 뒤였지만 말이다.

대체 왜 피해자는 자신을 짐승처럼 잔인하게 강간했던 사람, 같은 공간에서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단 사람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고른 걸까. 이 책은 이렇게 선한 의도를 가진 선한 사람이 결과적으로 끔찍한 부정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법학자 애덤 벤포라도는 형사 사법제도의 허점을 맹렬하게 좇으며, 오늘날의 수사와 재판이 상당히 허술하다고 지적한다. 변호사 활동 후, 드렉셀대 법학 교수가 된 벤포라도는 인지 심리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는 등 형사 사법제도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그는 피해자, 피의자, 수사관, 판사와 검사 등 다양한 당사자들의 '기억의 한계' 같은 법 실행 과정에서 저지르는 오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편견과 착각에 휘둘린다. 법 집행도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형사 사법제도는 21세기에 도착한 건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적잖이 당혹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어떤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범인을 찾아 처벌함으로써 도덕적인 평형을 회복하려는 욕망이 때로는 공정한 대우에 대한 헌신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우리는 이미 스스로의 이런 측면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인정하기는 죽도록 싫지만 말이다. 폭력과 피로 얼룩진 이런 불공정이 역사책이며 신문 지면을 더럽히고 있다.    p.282

이 책은 심리학과 신경과학에서 나온 새로운 연구 결과에 의존해 미국의 형사 사법제도를 해치는 요소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저자가 들려주는 사례들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며,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혼란스럽고 놀랍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성과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의식적인 통제 없이 진행되는 자동 처리 과정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법이란 불편부당하며 법률 소송의 승패는 증거와 철저한 논리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고 싶겠지만, 지난 20년에 걸쳐 심리학자, 신경과학자들은 의식적인 자각 너머에서 작용하는 여러 인지적 요인들을 밝혀냈으며, 이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들을 알려 주고 있다. 법률 소송 결과가 사실은 피고의 자백 녹화영상에서 카메라 앵글, 하루 중에 어느 시간에 심리가 진행되는지, 반대심문에서 단순한 단어 선택 같은 무관해 보이는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있겠는가 말이다.

겉으로는 정의롭고 공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책에 따르면 실제 미국의 형사 사법제도는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안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그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경찰의 강압적인 심문 기법, 잘못된 기억으로 범인이 아닌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목격자, 피의자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를 피의자 측 변호인에게 넘겨주지 않는 검사, 사람인 이상 편견을 가지고 재판에 임할 수밖에 없는 배심원과 판사 등등.. 미국의 형사 사법제도의 문제점과 그에 대한 개혁안도 제시하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법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다양한 심리학적, 신경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매우 이해하기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례들과 함께 보여주고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어떤 개혁이든 출발점은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저자가 '불평등'이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우리 모두 기존의 형사 사법제도를 새로운 눈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 결과에 대한 인식을 넓히게 된다면, 현재의 결점들을 발견하게 되고, 더불어 향후 나아갈 방향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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