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스
워푸 지음, 유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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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는 명확하게총격 현장을 언급했다. ‘이 자식이 정말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나무 두드리기』를 읽기라도 했단 말이야? 아니면 그냥 우연히 때려 맞춘 건가?’

그는 재빨리 자신의 메모와 소설 내용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추리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아귀가 정말로 책을 읽어봤다 한들, 이 부분 어디에 문제가 있단 말인가?    p.28

문단에서 꽤 이름을 떨치는 작가인 그는 대작 발표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순문학계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가 이번 신작은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추리소설을 발표할 예정이었기에, 모든 독자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소설 출간 전에 이미 각종 프로모션 이벤트가 잡혀 있었고, 예약 판매 일정과 언론 인터뷰도 일찌감치 이야기가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익명의 독자로부터 온 메일 한 통 때문에 그는 도무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작품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며 대놓고 지적하는가 하면, 이 소설은 좋은 작품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혹평하는 메일이었던 것이다. 아귀라는 서명을 쓰는 그 독자는 대체 원고를 어떻게 읽어본 것이며,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작품 속 추리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일까. 분노한 작가는 메일로 독자와 설전을 벌이게 되는데, 어이없게도 아귀가 지적한 부분들이 모두 실제로 수정을 요하는 문제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출간 일정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아귀의 정체는 누구인가.

일곱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각각의 이야기에서 한 명의 작가와 그가 쓴 하나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귀라는 네티즌이 등장한다. 모든 단편이작가와 네티즌이 미발표 추리소설을 놓고 소설 속의 누가 진범인지 토론을 벌인다라는 불가사의한 구조를 띠고 있는데, 매우 흥미진진하다. 작가와 네티즌이 작품 속 설정과 추리 과정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과정도 재미있고, 작가가 쓴 추리소설이 마치 액자소설처럼 교차로 보여지고 있어 재미를 두 배로 안겨준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문제가 돌고 돌아온 거다. 타이 행성 탐정은 나 행성 경찰이 제공한 단서가 정확하다고 어떻게 확신할 것인가?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린 이 두 정권의 최고 형벌은 사형이었다. 비록 이야기에 써넣을 필요는 없겠지만, 다섯 명을 죽인 타이 행성 사람 셋은 분명 사형당하리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만일 이 세 사람이 진범이 아니라면, 함부로 세 사람의 목숨을 빼앗게 되는 것 아닌가? 그녀는 돌연 소설을 쓰는 데서 오는 중압감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p.197~198

사실 이 작품은 '작가와 네티즌이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추리소설을 놓고 소설 속의 누가 진범인지 토론을 벌인다'는 설정도 흥미롭지만, 일곱 편의 이야기가 지난 30년간 타이완에서 일어난 유명 범죄 사건 7건을 모티브로 삼아 재구성한 소설이라는 점이 정말 의미가 있다. 게다가 그 실제 사건에서 범인으로 체포됐던 이들이 모두 무고하게 누명을 쓴 것임을 탄탄한 추리의 과정을 보여주며 밝혀내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인 워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건이 마치 엉터리로 쓴 추리소설 같다'고 말한다. 게다가 현실 속 억울한 누명 사건 속의 '범인'은 결코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도 끔찍하다고 말이다. 누군가 자신이 받아서는 안 될 어떤 형벌을 마주하게 되면, 그의 실제 삶인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는 실제 그렇게 억울한 누명 사건들을 접하고는 자신이 '소설 형식으로 사건의 의문점에 대해 감식 증거 분실이나 추리 부분의 문제 같은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이 그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책을 '가볍고 흥미로운 단편소설집이고, 소설의 형식으로 창작 기법을 설명하는 소설집이며, 한 권의 추리소설'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작가들은 아귀와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마치 창작 강의안 같다', '문예 창작 수업의 강의안처럼 보인다'라고 생각한다. 아귀는 이야기의 구성 요소인 전제, 주제, 인물, 플롯과 설정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잘못된 추리로 인해 누군가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수도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픽스FIX’라는 단어에는 이처럼 잘못 쓰인 작품을고치고’ ‘바로잡고’ ‘보완하며동시에 이 이야기들을마음 깊이 기억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니,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마지막 작가 후기에 이르면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무게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설 창작의 세계와 타이완의 30년 사회 현실, 그리고 원죄 사건과 그것을 풀어내는 특별한 추리소설을 통해서 새삼 이야기가 가진 의의와 대체 불가능한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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