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래도 즉효성을 요구하는 요즘 사회에서 그렇게 여유로운 자세로 살다 보면 가끔 스스로가 바보 같아지곤 한다. 목청 높여 누군가를 통렬히 매도하는 편이 훨씬 똑똑해 보인다. 이를테면 작가보다 비평가 쪽이 똑똑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설령 어떤 창작자가 가끔 어리석어 보인다 해도(또 실제로 어리석다 해도), 제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얼마나 품이 들고 고된지 나는 너무나 잘 알기에 그걸 두고 한마디로 '저 녀석은 쓰레기다. 이건 똥이다'라고 매도해버릴 수는 없다.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창작자로서 지켜갈 삶의 자세의 문제이자, 나아가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다.   p.80~81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자이 미즈마루의 에세이 시리즈 그 마지막 권이다. 1998, 2007년에 각기 다른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고, 이번에도 역시나 다른 제목으로 새로운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기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던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으로 출간되었던 다섯 권을 잇는 시리즈로 나와 표지도 더 세련된 느낌이다.

보통 단편집이나 에세이의 경우 소제목을 전체 제목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경우 매번 출간될 때마다 그 제목이 달랐다는 점도 흥미롭다.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는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흘러간다'였고, 두 번째는 '안자이 미즈마루의 비밀의 숲'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다. 하루키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작년 여름 세상을 떠난 우리 집 장수 고양이 뮤즈의 영혼에 바치고 싶다'고 했고, 책 속에서 뮤즈에 관련된 에피소드도 여럿 등장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뮤즈가 하루키의 집에 왔을 때가 생후 육 개월이었는데, 무려 스물한 살까지 살았던 고양이였다. 인간으로 따지면 백 살을 넘긴 셈이니, 정말 오래 살았던 '장수 고양이' 였다.

하지만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 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그때, 나와 그애 사이에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서 어떤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고, 그것을 우리가 공유한다는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고양이니 인간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였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사뭇 기묘한 체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의 멋진 고양이가 대개 그렇듯이- 뮤즈도 마지막까지 평소에는 우리에게 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p.140

이 책에는 뮤즈와의 에피소드들 뿐만 아니라 공중 부유 꿈에 대한 여러 가지 타입을 이야기하고, 한낮의 회전초밥 가게에 숨어 있는 함정, 이상한 러브호텔 이름에 대한 탐구, 컴플레인 편지 쓰는 방법, 학교의 체벌 문제, 문학전집에 실리는 것을 거절한 이유, 취미로 하는 번역의 의미 등등.. 엉뚱하고, 유쾌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하루키가 이 글들을 쓸 즈음은 <노르웨이의 숲< <태엽 감는 새>로 대중적인 성공과 문학적 성취를 함께 거두고, 옴진리교 지하철 테러사건 피해자를 취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한창 작업중이던, 소설가로서 터닝 포인트에 속하는 시기였다. 밀리언셀러를 내는 인기 작가이면서 문단의 주류에서는 벗어나 있는 자신의 고충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이야기도 있어 흥미로웠고, 특유의 관조적인 화법과 위트 섞인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일상생활 속의 소소한 발견들도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키가 여행을 갈 때마다 선택하는 책과 그 작품이 왜 여행에 최적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 또한 흥미로웠다. 나 역시 여행 계획을 세울 때면 제일 먼저 하는 고민이 어떤 책을 가져갈까인데, 이렇게 하루키 처럼 조목조목 명확한 이유를 따져 가면서 고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거라면 언제 어떤 여행이든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만능 책이 한 권 있다면 인생이 편해질 확률이 높다는 하루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능하면 사생활에서 익명성을 보장받고 싶지만 간혹 길에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겪는 고충들도 재미있었고, 자신에게 딱히 이상형이라고 할만한 건 없지만, 그래도 긴 인생에서 번개를 맞은 듯 극적인 만남이 두 번이나 있었다는 고백 아닌 고백도 너무 귀여웠다. 정말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풍경들, 이렇게 사소해도 되나 싶을 만큼의 평범한 생각들이 주는 여유로움이 하루키 에세이만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게, 아무 페이지나 쓱 펼쳐서 아무렇게나 읽어도 곧 킬킬대고 웃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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