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살인사건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3
에드거 월리스 지음, 허선영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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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튼은 곧 어느 비열하고 배은망덕한 여자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인 여자를 구해 주고 도움까지 줬는데 여자가 매번 자신을 배신했노라고 말이다. 손튼은 시인이었다. 게다가 거짓말을 생생하게 지어내는 재주도 있었다. 그 여자에게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조롱하는 불쾌하고 노골적인 비난을 들은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그 모욕감에 힘입어 거짓말이 진실처럼 술술 나왔다.    p.33

주옥 같은 시를 쓴 시인이자 저명한 백화점 사장이며 자선 활동으로도 유명한 백만장자 손튼 라인이 하이드파크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사인은 심장을 관통한 총상이었으며, 가슴에 난 상처는 피 묻은 여자 실크 잠옷으로 묶여 있었다. 가슴 위에는 두 손이 가지런히 모인 채 올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수선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상한 건 옷은 제대로 갖춰 입었으나 신발은 두꺼운 펠트 천으로 된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구두와 자동차는 그 장소로부터 백 미터쯤 떨어진 길가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동차 안에서 피로 얼룩진 코트와 조끼가 발견되었는데, 조끼 주머니에서 폭 5센티미터 가량의 빨간색 정사각형 종이가 있었는데, 종이에는 검은 잉크로 굵게 한자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자화번뇌'. 스스로 일을 자초했다는 뜻의 사자성어였다.

사실 젊은 사장인 손튼 라인은 자아도취에 빠져 상대를 배려하지 못했고, 품격 높지 않은 얇은 시집을 낸 허세 가득한 인물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가 백화점 경리과 직원인 오데트 라이더에게 구애를 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회사 공금에 손을 대고 있는 백화점 매니저 밀버그를 조사하기 위해 탐정 잭 탈링과 약속을 잡은 참이었는데, 상처 받은 자존심에 생각을 바꿔 오데트 라이더에게 횡령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하지만 상하이에 경찰로 재직 당시 중국 공안 당국이 인정하는 유명한 형사였던 탈링은 그의 계략을 눈치채고 제안을 거절한다. 어쩔 수 없이 손튼은 절도의 달인인 샘 스테이가 출소하는 날 찾아가 오데트 라이더에게 복수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음 날 갑작스럽게 손튼이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용의자는 그의 구애를 거절했던 오데트 라이더, 공금을 횡령해온 매니저 밀버그, 그리고 손튼을 흠모한 전과자 샘 스테이이다. 과연 손튼을 죽인 자는 누구일까?

상상력이 장난을 친 것일까, 아니면 모퉁이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 흰 얼굴을 정말로 힐긋 본 것일까? 탈링이 다시 손전등을 비추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형체가 사라진 곳으로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다시 손전등을 비추어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 쪽에서 나무가 우거진 수풀 쪽으로 검은 형체가 움직였던 게 분명했다. 다시 손전등을 비추어 보았지만 성능이 좋지 않아 멀리까지 보이지 않았다. 탈링은 형체가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터벅터벅 걸었다.    p.239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그 세 번째 작품이다. <트위스티드 캔들>, <네 명의 의인>에 이어 <수선화 살인사건>을 만나 보았다. 갑자기 판형이 바뀌어 시리즈 느낌이 갑자기 사라져버렸지만, 기존 두 권이 좀 올드한 느낌이었던 터라, 오히려 지금의 판형과 디자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에드거 월리스는 영화킹콩의 원작자이자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와 동시대에 사랑받은 작가였다. 생전 17편의 희곡과 957편의 단편, 그리고 170여 편의 소설을 남겼을 뿐 아니라, 160여 편은 영화로 제작되었고, TV시리즈로도 방영된 유명 작가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의 세련된 추리, 스릴러 소설 작법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추리의 빈도가 그렇게 높지 않고, 20세기 초반의 대중작가들이 만든 작품 특유의 맛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런 부분 때문에 더 흥미롭게 읽히기도 한다.

고전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앞서 만난 두 작품 보다 이번 작품이 더 술술 잘 읽혔으니 말이다. 투박하지만 정직한, 촌스럽지만 당시의 시대상이 느껴지는, 그런 고전 추리소설이 궁금하다면 에드거 월리스의 작품을 만나보면 어떨까 싶다. 엄청난 다작을 했던 작가답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테니 말이다. 세련된 요즘 스타일의 심리 스릴러나 복잡한 플롯의 미스터리만 읽어 왔던 독자들이라면, 에드거 월리스의 작품들을 굉장히 색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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