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로 판결해버리면 판사는 마음
편하다. 억울한 죄인을 만들
가능성은 제로가 되니까. 하지만 그걸로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피해자가 사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해놓고서, 정작 처벌을 맡은 국가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법관은 당위 말고
다른 건 고려할 필요 없어, 하고 외면하면 그만일까. 살의를 품은 예비 범인을 안심시키는 판결이 되지는 않을지 한 번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완전 입증을 요구할수록 오판 가능성은
낮아진다. 판사의 마음은
이쪽이 편하겠지만 그만큼 완전범죄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판사는 그 책임은 지지 않는다. p.53
작가이자 판사로, 이제는 변호사로 활동 중인 도진기 작가의 신작
논픽션이다. 도진기 작가의
국내 출간작들은 거의 다 읽었지만, 어쩐지 이번 신작은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이라서 더 기대가 되었던 작품이다. 아무래도 그가 장편소설을 여덟 편이나 발표한 소설가이긴
하지만, 판사로, 변호사로
법의 최전선에 여전히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이나 실망시키지 않는 작품이었다. 어려운 법률 용어들도
등장하고, 구체적인 사건 전개
과정 등이 나열되는 등 다소 딱딱할 수도 있는 글인데도 너무 술술 잘 읽혀서 깜짝 놀랐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논픽션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책에는 도진기 작가가 변호사가 된
후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판결의 재구성> 원고와 각 파트 끝에 조선일보
<일사인언>
코너에 쓴 짧은 수필들이 수록되어 있다. 도진기 작가가 경향 신문에 연재한 '판결의 재구성'을 가끔 읽었었는데, 이렇게 한 권의 책에 담아 놓고 보니 정말 훌륭한
논픽션이 된 것 같다. 김성재
살인사건, 낙지
살인사건, 이태원
살인사건,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 등등...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다 알고 있는 그 사건들의 실제 판결 과정과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작가 도진기가
20년 판사 생활을 통해 들여다본 가장 뜨거웠던 30번의 판결들을 모은 것인데, 사건이 아니라 판결을 들여다본다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건의 제목만 보고는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사실들,
언론에 숱하게 보도 되었던 정보들의 나열이 아닐까 추측했던 점은 책을 읽으면서 완전히 판단
착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중의 입장에서 들어서 알고 있던 정보들의 나열과 실제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해당 사건들의 진행 과정과 판결을 낱낱이 분석해서
도출한 사실들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생생한 논픽션의 매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틈으로 인해 진범을 놓치는 일은
안타깝다. 그러나 그 틈을
메우는 건 법 이론이 아니다. 합리적 의심 기준을 완화하면 억울한 이들이 생기기 쉽고,
반대로 강화하면 범인이 빠져나가기 쉽다. 여기서 필요한 건, 혹은 앞으로 더 필요한 건 수사 기술과 시스템이다. K 순경 사건에서처럼 현장 경찰관의 엉성한
기록만을 믿고 법의학적인 판단을 해서는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외부인 침입 가능성'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건, 초동 수사에서의 법의학적 자료 확보와 과학적 분석, 감정 같은 것들이다. 그 발전이 언젠가 법률가들을 '합리적 의심'에 대한 고민에서 완전히 해방시킬지도
모른다.
P.287~288
이 책의 부제는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이다. 사람들은
재판이 재판 외적인 이유로 왜곡되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도진기 작가도 이 책을 통해 말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같은 말은 이젠 거의 법정에 대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는 거나 다름없는 수준의 클리셰가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법정 밖의
시선과는 다르게 법정 안의 일반적인 정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무의식적인 편향이 있을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달리 대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이니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을 테고,
실제로 돈이나 사회적인 지위로 재판에서 유리하게 판정이 되곤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차별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판결의 안쪽을
들여다보고, 더 나은 판결을
위해 고민하는 작가의 시선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각각의 사건에 대한 케이스에 대한 과정과 판결에 대한 소개가 끝나고 나면, '그저 공상에 불과한 것인데'로 시작하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법률가로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몽상이라며, 비법률가적인
공상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런 대목들을 가장 흥미롭고,
통쾌하고,
속시원하게 읽었다.
평범한 시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건의 부당함과 안타까움도 담고 있고, 추리소설 독자로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상상력도
놓치지 않으면서, 법률가로서의
통찰력도 있는 의견들이기 때문이었다. 판결의 논리와 상식이야말로 시민의
‘믿는 구석’이어야 한다는 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던 이유도, 올바른 판결이 시민들의 억울함을 풀고 법의 힘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줄 거라는 믿음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 희망이 보였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각 파트의 끝에 수록된
짧은 에세이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주로 그의 독서 편력을 엿볼 수 있는 책에 관한 짧은 단상들인데,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가
20대에 흥미롭게 읽었던 작품들, 교고쿠 나쓰히코의 <망량의 상자>와 오쓰이치의 <GOTH 고스>에 대한 특별한 리뷰, '히가시노 게이고를 지옥으로 보내겠다!'는 홍보문구를 떠올렸던 이유
등등... 도진기 작가의 개인
서재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글들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작년에 문유석 판사님도 쾌락독서라는 책을 쓰셨는데, 도진기 작가님의 독서, 책 읽기에 관한 에세이도 따로 책으로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