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조용히 겨울을 향해 가는 시간은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시간이자,
필요한 무엇이든 창고에 그득하게 채워 넣는 시간이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모두 모아 가까이에 두면
마음이 놓였는데, 온기와 생각
그리고 중요하고 가치 있고 심지어 친숙하기까지 한 나만의 것을 깊은 구덩이 안에 묻어 놓고 내 손으로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추위와 폭풍우와 어둠이 몰려들어도
문제없었다.
p.12
토베 얀손이 26년에 걸쳐 출간한 ‘무민’ 시리즈 연작소설 전체 여덟 편이 완간
되었다. 이 작품은 그 중
마지막 여덟 번째 작품이다. 마지막 작품은 작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 빈자리를 견딜 수 없어 쓴 작품이다. 무민 가족이 외딴 등대섬으로 떠난 뒤 텅 빈 무민
골짜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무민 가족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무민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의 풍경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던 사랑스럽고 조그마한
것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따로 살아가던 이들이 무민 골짜기로 모여든다. 가을이 조용히 겨울을 향해 가는 시간,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혔고, 곧 추위와 폭풍우와 어둠이 몰려올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머무르는 이와 떠나는 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이제 무민 골짜기 친구들이 모두 일어날 시간이군' 스너프킨은 쉬지 않고 고요한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너프킨, 밈블, 훔퍼
토프트, 필리용크, 헤물렌
그리고 그럼블 할아버지까지 모두 여섯. 명이 빈집에 찾아 든다. 어쩐 일인지 무민 가족의 집은 텅 비어 있었고,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집이란 뭘까.’
스너프킨은 바닷속으로 이어지는 좁고 가파른 계단에
앉았다. 바다는 고요했고
잿빛이었으며 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무민 가족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오게 만들기란 어렵지 않은 일인지도 몰라.
섬은 지도에 다 나와 있으니까. 거룻배는 물이 새지 않게 구멍을 막으면 되고. 하지만 왜? 그냥 내버려두자. 무민 가족들도 외따로 떨어져 있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p.132
피곤하고, 외롭고, 울적하고... 저마다 다른 이유였지만 각자 무민 골짜기에
대한 기억만은 정겹고, 따뜻하고, 즐거운
그것이었다. 그래서
걱정거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민 가족이 사는 평화롭고 행복한 무민 골짜기를 찾아 온 것이었는데,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텅 빈
집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모두 주인 없는 빈집에 머물며 언제 올지 모르는 무민 가족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렇게 집 안이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집은 여전히 비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도 다른 이들 여섯 명이 한 지붕 아래에서 무민 가족이 돌아올 때까지 잘 지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원제는 ‘무민 골짜기의 11월’이다. 낙엽들이 바닥에 가득하고, 나무들은 휑해지고, 스산한 바람 소리가 겨울을 불러오는 가을의
끝자락이다. 행복하고
자유분방하며 너그러운 무민 가족이 없는 집에서 여섯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의 소리는 어쩐지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를 위해 글을
쓴 작가의 심정이 투영되어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토베 얀손은
56세에 발표한 이 작품을 끝으로 무민 시리즈를 더는 집필하지 않기로
했었기에, 더욱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투영된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행히도 이 작품이 토베 얀손의 마지막 작품이 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 작품에서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던 무민
가족은 끝내 등장하지 않고 이야기가 끝이 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무민파파가 걸어 놓은 남포등이 빛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배는 아주 멀리 있었지만, 그들이 곧 도착할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