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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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달라." 현학자가 저녁 요리를 식탁에 가져다 놓으며 말했다. 치커리를 곁들인 돼지갈비살 두 접시였다. 누가 들어도 자기연민으로 삐걱거리는 어조였다.

"사진과 같으리라 기대하는 건 이의 요정을 믿는 것과 같아." 현학자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가 대답했다.

맞는 말이다. 다년간의 영웅적 노력 끝에 조금이나마 요리의 지혜를 터득했는데도 왜 그걸 잊고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지 참 한심한 노릇이다.   p.91~92

우리 집 서재에도 요리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큰 편이다. 나도 한때는 요리를 책으로 배웠던 초보 요리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요리에 대한 열정도 그만큼 넘쳐났던 터라, 프랑스 음식에 꽂히면 프랑스 요리에 대한 책을 줄줄이 사서 한 동안 저녁 식탁에는 듣도 보도 못하던 프랑스 요리가 이어졌다. 일본 가정식에 꽂히면 일본 요리책들이, 파스타에 꽂히면 이탈리안 요리책들이, 그 외에도 전골 요리, 오븐 요리, 채식 베이킹, 디저트 요리책 등등 수많은 요리책들을 섭렵했다. 하지만 책에 실려 있는 사진처럼 요리가 나왔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셰프들이 알려주는 계량법은 늘 헷갈렸으며, 분명 레시피 순서대로 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맛의 요리가 완성되는 경우도 너무 많았다. 그렇게 나처럼 요리책과 사투를 벌여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그야말로 공감 이백프로에 페이지마다 킬킬대며 읽게 될 것 같은 책이다.

이 책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시대의 지성, 줄리언 반스의 요리에 대한 에세이이다. 어려서 요리를 배울 기회가 충분치 않았던 줄리언 반스가 중년이 되어 뒤늦게 낯선 영역이던 부엌에 들어서서요리를 책으로 배우며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줄리언 반스는레시피대로하면 맛있는 음식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완벽주의를 고수하지만, 이상하게도 요리는 늘 어딘가에서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백 권이 넘는 요리책을 사 모으며 요리 경험과 교훈을 쌓아나가게 되는데, 까칠한 부엌의 현학자가 투덜거리는 말들이 거의 모두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어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바로 그거다. 빵을 고르는 일. 버터를 마음대로 마구 쓰는 일. 부엌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일. 재료를 조금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 친구와 가족을 먹이는 일.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는, 단순화할 수 없는 사회적 행위에 참여하는 일. 내가 아무리 트집을 잡고 항의의 말을 했어도 콘래드의 말이 맞는다. 그것은 도덕적 행위다. 온전한 정신의 문제다.    p.192

특히나 이 책이 흥미로웠던 것은 줄리언 반스가 실제로 다양한 요리책들을 사서 읽고, 레시피를 재현해보고, 불친절한 레시피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 지를 경험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거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돈으로 대가를 치른 조언을 해주면서, 요리책을 구매할 때 주의사항에 대해 낱낱이 알려주기도 한다. 우선 첫째, 요리책의 화보를 보고 책을 사지 말 것. 음식을 전문으로 촬영하는 사진 작가의 화보대로 실제 요리가 완성되는 경우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둘째, 지면 배치가 복잡하고 화려한 요리책은 절대로 사지 말 것. 셋째, 범위가 너무 넓은 책은 피할 것. 넷째, 요리책을 노골적으로 진열해놓은 음식점에서 충동 구매하지 말 것. 다섯째, 집에 주스기가 없으면 주스 책을 사지 말 것. 등등.. 오랜 세월에 걸친 그의 요리책 수집 경험을 통해 들려주는 조언들이 사실 대부분의 요리책들에 해당되는 핵심을 찌르고 있어 매우 유쾌하기도 했다.

 

우리네 엄마들이 해주던 음식의 특징은 정확한 계량이 아니라 대충 손짐작으로 넣는 재료들과 분명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얼마 안 있으면 뚝딱뚝딱 마술처럼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아닐까 싶다. 어릴 때 가끔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고는 너무 맛있어 방법을 물어보면 대부분 적당히, 한움큼, 살짝 등등 이해할 수 없는 계량법을 알려 주곤 했다. 그게 뭐야. 했는데 그 뒤로 세월이 흐르고 보니 매일매일 음식을 만들면서 쌓이는 노하우라는 것이 정확한 레시피와 계량법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건 매일 요리를 일상처럼 하게 되는 경우에 알게 되는 것들이고, 대부분의 요리 초보자들 혹은 가끔 요리를 하게 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레시피야말로 대체 어쩌란 말인가 싶은 불친절한 요리법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요리책이라 이름 붙은 레시피의 설명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일 것이고 말이다. 줄리언 반스는 스스로를 아마추어 요리사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굉장히 요리를 자주, 관심 있게 하는 편에 속한다. 그래서 그가 모호한 요리책에 퍼붓는 혹독한 독설이 그냥 투덜거림이 아니라 지적이고 위트 있는 에세이가 될 수 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요리란 쓰는 식재료와 먹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이들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소통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한 그릇의 요리가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도 그렇다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요리를 시작한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요리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는 것에 대해 유쾌하고 따뜻한 사유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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