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오분쯤 후, 볼 때마다 늘 경이롭게 느껴지는 제네바의 호수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때까지 뒤적거리고 있던,
취리히에서 구입한 로잔의 지방신문을 옆으로 치우려는 순간, 어떤 기사를 보게 되었다. 1924년 여름에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유골이 칠십이년 만에 오버아르 빙하에서 발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자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때로는 칠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나와, 반들반들해진 한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는 것이다. p.34
사람들은 다양한 제각각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러니 멀리 타국으로 떠나는 이민이 아니더라도 고향을 떠난 것으로 인한 상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도 변하겠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욕망이나 갈망에 의해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이 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 작품 속에서
제각각의 이민자들이 품고 있는 그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상실의 세계,
고향과의 단절,
마음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디에도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 등등.. 작가는 이름도 없이 파묻힌 역사의 개별자들의
이야기를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로 투영시켜 보여주고 있다.
생전에 단 네 권의 소설을
남겼지만 ‘제발디언(Sebaldian)’이라는 용어가 생길 만큼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한
20세기 말 독일문학의 위대한 거장 W. G. 제발트의 대표작인 <토성의 고리>와
<이민자들>이 작가 탄생 75주년을 맞아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본문 전체를 원문과 다시 대조해 전반적으로
표현들을 다듬고 몇몇 오류를 바로잡아 번역의 엄밀성을 높였다.
또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옮긴이주를 보강하고 외국어 고유명사의 표기법도 새로이
손보았다. 특히 흐릿했던
사진들의 화질을 개선하고 크기와 배열도 독일어판 원서에 가깝게 실었다.
제발트의 작품은 오래 전에
<현기증.
감정들>만 읽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제발트 읽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 전날 오후 늦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호텔
창가에 서서 찬찬히 내려앉는 어스름 속에 하얗게 떠있는 도시를 보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도 적어놓았다.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p.185
<이민자들>은
네 명의 이민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편의 공통 화자로 등장하는 나(작가의 분신)는 예전에 영국에서 세 들어 산 집의 주인이던 헨리 쎌윈
박사, 독일 고향 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파울 베라이터, 미국으로 이주해 은행가 가문의 집사로 지냈던 친척 할아버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1960년대 후반 영국으로 이주했을 당시 알게 된, 독일 출신의 유대인 화가 막스 페르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모두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 고향을 떠나 외국에서의 삶을 살았다.
타인의 삶을 재구성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작가는 여러 사람의 증언을 녹취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사진을 수집할 뿐만 아니라 직접 그 현장을 여행한다.
그는 이 작품 속 인물들을 실제로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살았던 곳을 찾아가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제발트가
서술하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 독특한 점이다.
팩트와 픽션을 절묘하게 결합한 그의 작품에서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발트의 작품에서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아마도 텍스트와 동행하는 사진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의 작품들에는 항상 사진을 텍스트의 한 부분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빽빽한 텍스트 만큼이나 문장의 중간중간에 사진들이
꽤 많이 삽입되어 있다. 이
작품에도 실종된 지 칠십이년 만에 빙하에서 유골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실린 신문,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었던 파울 베라이터가 목숨을 끊었다는
철로, 이민을 떠난 친척들의
사진, 외삼촌의 첫 직장이었던
에덴 호텔, 외삼촌이 현관
옷장의 거울에 끼워놓고 간 명함, 티스메이드라고 부르는 차 만드는 기계 등 오래된 과거의 흑백사진들이 칠십 여장이나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들은 소설의 내용이 대부분 사실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작가가 사진에 적합한 허구적 내용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모두 사실이라고, 혹은 허구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제발트의 작품이 갖는 독특한 매력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사진과 사물,
타인의 기억과 자료를 통해서 기억을 만들고, 불러내는 마법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랜 만에 다시 읽는 제발트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다음
에는 <토성의
고리>를
만나봐야겠다. 봄이라는
계절은, 제발트를 다시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