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버지가 영오를 무릎으로
밀어내며 화를 냈다. 정신
사납게, 저리가! 영오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뒤로는
아버지 가까이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앉아 있든, 서 있든. 그날
아버지는 피곤했거나 일터에서 모욕을 당했거나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을 것이다. 아니면 몸이 아팠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있든
없든, 많든
적든,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 가시처럼 기억에 박히기도 한다. 어떤 틈은 희미한 실금에서부터 벌어지고,
어떤 관계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만으로도 망가진다. p.69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야근
중인 참고서 편집자 영오,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나 이마에 붙인 상처 얘기가 나와 며칠 전 아버지가 살던 곳을 찾아갔던 일을 떠올린다. 엄마는 사 년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엄마를 간호하는
동안 몇 안 되는 친구들과도 멀어졌었다. 외가든 친가든 드문드문하던 친척들과의 왕래마저 끊겼고,
지난 가을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는 영오 혼자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
소원해져, 사 년 동안 예닐곱
번쯤 만난 정도가 다였다. 갈
때마다 아버지는 중학교 경비실에서 근무 중이었고,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외동딸이 와도 왔냐 소리도 제대로 않는 아버지를 보며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다. 그리고 며칠 전 아버지가 살던 곳의 집주인 연락을 받고 월세 보증금 천만 원과 밥솥 하나를 아버지의 유품으로 받아
왔다.
아버지가 남긴 밥솥에는 얇은 수첩이 하나 들어
있었다. 수첩의 앞 두어 장은
백지였고, 세 번 째 장에
크고 비뚜름한 글씨로 '영오에게'라고 써
있었다. 그 아래 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빚쟁이들인가 싶었지만, 아버지에겐 빚이 없었다. 아버지의 휴대폰에도 수첩 속 인물들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름 중 하나인 홍강주라는 사람에게 전화가 와 그를 만나게 되고, 그가 아버지가 경비원으로 일했던 학교의 수학
교사라는 걸 알게 된다. 영오는 그와 함께 나머지 두 명을 찾아 나서게 된다.
아버지는 영오에게 대체 왜 이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남긴 것일까.
강주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작년에 자살한 학생. 살아 있었다면 이번에 졸업이죠. 내가 가르친 애는 아니에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녀석. 다들 쉽게 말하지만....."
택시가 우회전했다. 거리가 밝아지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차들의
속도도 빨라졌다. 모퉁이
하나로 다른 세상에 들어선 듯했다. 영오는 달라진 세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알겠어요. 사람들은 몰라요. 아무도,
아무것도." p.150
이야기는 참고서 편집자인 영오가 죽은
아버지가 남긴 수첩에 적힌 세 사람을 찾아 나서는 여정과 영오가 일하는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질문을 퍼붓는 열일곱 소녀 미지의 사연으로
진행된다. 고등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미지와 회사에서 잘린 아빠는 집에서 쫓겨난다.
그들이 예전에 살던 아파트를 팔지도 않고 세를 놓지도 않은 상태로 두었던
터라, 엄마에게 쫓겨난 부녀는
당분간 예전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엄마가 치킨 집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충분했지만,
백수 남편이든 백수 딸이든 안 된다는 엄마는 나가서 정신을 차리든가 속을 차리든가 하라고
했다. 옆집에는 성격이 괴팍한
할아버지가 고양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고, 미지는 버찌라는 고양이와 친해지며 할아버지와도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이 작품 속 등장 인물들은 모두 세상과의 관계가
서투르다. 하지만 각자 어떤
계기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닫힌 마음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된다.
이제 서른 셋이 된 영오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넌 정말 개떡 같은 책이야.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어.'라고.
그렇지만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여기서 다치고, 저기서 넘어지고, 삶의 길목마다, 일상의 고비마다 상처를 받고, 흉터를 만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서른세 살 영오와 열일곱 살 미지가 살아가는 녹록하지 않은 삶의 여정들이
공감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이 역시나 뭔가 부족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삶을 채워가는 이야기는 담백하게 유머스럽고 가볍게 진행되고
있지만, 분명 어딘가 뭉클한
지점이 있다. 그건 바로
이들의 이야기가 나와 당신의 그것이기도 해서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