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K
돈 드릴로 지음, 황가한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을 정의하는 요건은 그것에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은 훼손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형태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합니다."

"영원히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 쓸모가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궁극적인 진리와 마주하게 될까요?"

"사람들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주는 고통 때문이 아닐까요?"   p.77

주인공 제프 록하트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비밀 단지로 향한다. 그의 아버지 로스 록하트는 육십대 중후반의 억만장자로 생체공학과 신기술이 발전할 미래까지 육체를 냉동 보존하는 비밀 실험 프로젝트의 주요 투자자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고고학자 아티스가 불치병에 걸려 이 실험에 참여하기로 한 상태였다. 하지만 제프는 이 모든 것들이 혼란스러웠고, 낯설기만 했다. 그에 비해 아버지 로스는 의학적, 기술적, 철학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냉동 보존술로 몸이 냉동되고, 미래의 어느 시점이 되면 끝에 이르게 한 상황에 대응할 방법이 존재하는 시기가 올 것이고, 그때 정신과 육체가 복원되고 다시 살아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제프는 의붓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실제로 목격한 그곳의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이 때가 되기 한참 전에 몸에서 필수 장기들을 꺼내고 죽은 상태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 후드와 가운 차림으로 투명한 캡슐 안에 웅크려 있던 마네킹같은 모습들, 그들이 언제가 되든 다시 살아났을 때 모두 똑같을까. 인간으로 죽어서, 같은 크기의 드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이들은 경계의 바깥에서,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제프는 이곳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사유한다. '인간은 태어남을 선택할 순 없지만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영예로울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은 시간의 바깥에서, 역사의 바깥에서 살게 될까.

 

평범한 순간들이 삶을 구성한다. 어머니는 이 명제를 믿어도 됨을 알았고, 나 또한 결국은 우리가 함께 보낸 세월에서 그것을 배웠다. 엄청난 도약도, 추락도 아니다. 나는 이슬비처럼 내리는 과거의 작은 파편을 들이마시고 내가 누구인지 안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이 시간의 필터를 거친 지금은 더 선명하다. 다른 누구에게도, 아주 아주 조금이라도, 아무에게도, 그 누구한테도, 절대 속하지 않는 경험이다. 나는 그녀가 돌돌이를 사용해 천 코트에서 보풀을 제거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코트를 정의해봐, 나는 생각한다. 시간을 정의해봐, 공간을 정의해봐.   p.117

사실 '냉동 보존술'이라는 소재는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사람의 몸을 극저온에 보관해 미래의 사람들이 되살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인체 냉동 보존술'이라고 한다. 우주선을 타면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것처럼, 이 방법 또한 미래의 다른 시간대로 이동할 수 있는 일종의 시간 여행인 셈이다. 시신을 급속 냉동시켜 세포 조직의 부패를 막아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동안 보관했다가 부활이 가능해질 때 즈음해서 해동시킨다는 것인데, 실제 냉동인간 상태로 보관되어 있는 시신은 현재 미국과 러시아에 걸쳐 600여 구에 달한다고 하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과연 불로장생은 더 이상 헛된 꿈이 아닌 걸까. 질병 때문에 삶을 일찍 마감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기적 같은 기술이 그야말로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물론 냉동 보존에 워낙 거액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소재부터, 표지의 분위기까지 모두 전형적인 SF 작품처럼 이야기가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이라 흥미로웠다. 극중 '사람들이 평범하게, 쉽게 잊으며 하는 일들.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의 표면 바로 밑에서 숨 쉬는 것들. 나는 이런 행위, 이런 순간에 의미가 있길 원한다.'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어쩌면 이 작품이 쓰여진 방식이 바로 이런 방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보여지는 것 이면에 있는 것들을 살피고, 현재와 미래,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진지하고 예리한 통찰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니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소재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데다,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또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절묘한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