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여보, 자식을 키운다는 게 뭘까."

남편이 캄파리 소다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거, 신기한 맛이네."

남편의 이런 점이 좋았다. 어설피 눈치 빠른 소리를 해줬다면 팽팽히 당겨진 실이 뚝 끊겼을 것이다.

"자식을 키운다는 것......" 잊어버렸을 때쯤에야 남편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에 가슴속에 빨간 거품이 뽀그르르 피어 올랐다.   p.85

열아홉 나이에 밤업소에 들어온 사키코는 서른하나지만 스물다섯인 것으로 일을 하는 중이다. 쉽게 남자에게 홀딱 반하고, 또 쉽게 헤어지고, 버림받고,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하면서도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어머니에게 중학교 1학년인 딸을 맡겨두고 거의 신경도 안 썼는데, 통화하다 방학이라는 말에 놀러 오라고 말을 건넨다. 2년 만에 얼굴을 보는 딸은 사키코가 상상한 것보다 훌쩍 커 있었다. 완전히 어른스러워진 지하루에게 브래지어도 사주고, 주말에 함께 동물원도 가지만, 사키코의 관심은 딸이 아니라 여전히 남자다. 업소에 손님으로 와서 사교 댄스를 가르쳐 주곤 하는 야마씨와 사랑에 빠지지만 물론 끝이 좋을 리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랑의 허상만을 쫓으며 사는 사키코의 딸, 쓰카모토 지하루이다. 하지만 아홉 편의 연작 단편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지하루의 시점은 없다. 엄마인 사키코의 시점으로 진행된 첫 번째 이야기에서 열세살의 나이로 등장한 지하루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본가의 이웃 아줌마인 이쿠코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열여섯이다. 그리고 댄서로 취직을 하는 스무살, 슈퍼에서 배달 일을 하는 스물 두 살을 거쳐 서른여덟, 마흔 넷의 나이로 각각의 이야기 속에서 배경처럼 등장한다. 그러니까 지하루라는 여자의 인생을 그녀가 관계를 맺었거나, 스쳐 지나갔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때그때 여자와 관계를 맺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야스노리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상으로 나타나고 언어와 함께 흘러나왔다. 문득 깨달은 것은 여자가 모든 일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건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하고 미심쩍을 만큼 그녀는 담담히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았다.   p.292

사쿠라기 시노는 "시점이 없는 한 사람의 인간, 쓰카모토 지하루라는 여자의 반생이 서서히 드러나는 이야기로 만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삼대에 걸친 여성들, 어머니 사키코, 딸 지하루, 그리고 그 딸아이 야야코가 서로 전혀 관계를 맺는 일 없이 홋카이도의 각자의 땅에서 살아갑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각각의 완성된 이야기 아홉 편을 한데 모았을 때 원을 그리며 하나로 연결되며 정리가 되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사쿠라기 시노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지하루의 생각이나 감정 같은 것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녀를 아는 주변 인물들의 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엄마도 딸도 자진해서 한사코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는 이상한 성품이라든가, 남자에게 이 정도쯤이라면, 하고 넘보게 하는 어떤 종류의 허술함이 있었다든가, 가느다란 몸에 비해 젖가슴이 유난히 불룩하고 상냥한 구석이 전혀 없다든가, 결코 청결하다고는 하기 어려운 모습에 어딘가 아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든가 하는 식이다.

사쿠라기 시노를 '신 관능파 성애문학의 대표 작가라고 하는데, 확실히 그녀의 작품들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줄거리만 보자면 이 무슨 막장 드라마냐 싶은 이야기인데,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치열한 애증과 욕망이 그려져 있다. 살면서 좀처럼 '감정'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여자의 삶은 극단적으로 불행할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마냥 어둡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부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삶에서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포착해내는 것 같다고 할까. 일그러졌어도, 너무 슬퍼도,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더라도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 모두 저마다의 자리에서 반짝거린다. 몇몇은 흘러가고, 그리고 몇몇은 사라진다. 사라진 별에도 한창 빛나던 날들이 있었다. 우리 역시 밤하늘에 깜빡이는 이름도 없는 별들이었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삶 역시 하나하나의 별처럼 빛이 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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