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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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에 일곱 장하는 돈가스는가정의 평화라는 성찬식 풍경을 완성하며 저녁 식사로 준비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감춘 채, 가엾고 무해한 자기 딸의 평화에 금이 가지 않도록 고기를 질겅질겅 씹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이...........문장의 주어가 어느새 ''에서 '그들'이라는 삼인칭으로 바뀌어 있다. 그녀는 오늘의 메모를 글로 옮길 준비가 다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우스꽝스러움을, 유치함을, 자신을 포함한 통속의 세계를 용서한다, 용서한다.   -김성중 '등신, 안심' 중에서, p.53

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소설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려주는 짧은 소설집이다. 41년의 문학 생활에 걸쳐 늘 관심을 두었던,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소설가 29명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읽고 써낸 결과물은 그 자체로 그저 뭉클하다. 단편 소설보다도 짧은 소설인 '콩트'라는 형식 때문에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나갈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분량이 짧다는 것은 서사보다는 대개 인생의 한 장면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그리는 것이므로, 그야말로 부담 없이 페이지가 술술 넘어 간다.

결혼할 남자를 오로지 순간적인 사랑으로만, 낭만 100퍼센트의 요소로 선택했기에 신혼이 가시기도 전에 싸우기 시작한 부부의 이야기는 애처로운 화해로 끝난다. 등심과 안심을 '등신과 안심'으로 잘못 메모한 아내로 인해서. 그와 나는 둘도 없는 상등신들이고 우리는 화해가 이루어져 안심하고 있구나, 이것은 등신들이 안심하는 이야기구나, 라고 아내는 생각한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지만, 아마도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으로 오늘도 남편과, 아내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은 뜨끔할 지도 모르겠다. 김성중 작가의 '등신, 안심'이라는 작품의 이야기였다. 계약직 채용 심사에서 옛 연인에게 반대표를 행사하는 교수의 이야기, 분실물을 찾기 위해 탐정을 방문한 의뢰인이 어쩌다 보니 탐정의 잔심부름만 하게 되는 이야기, 안경을 잃어버린 난시의 주인공이 거래처 사람과 계약을 하며, 카페에서 점원에게 질문을 하며 자신처럼 안경을 잃어 버려 아주 가까운 거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맞닥뜨리게 되는 이야기 등등... 짧은 분량에 전혀 구애 받지 않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마음이란 얼마나 허약한지. 한 몸으로 여러 개의 역할을 하며 살아내야 하는 처지도 같고, 능력만큼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언제나 시간이 부족해 발을 구르는 것도 똑같은데. 너의 과거가 내 현재이고, 내 현재가 다시 너의 미래가 될 수도 있으며, 그런 서로에게 굳은 의리를 느끼는 것도 사실인데. 그런데 끝없이 서로의 현재를 비교하고 다른 점을 찾아내려 한다. 너의 행복을 나의 불행으로, 너무도 쉽게 치환해 버린다. 나보다 즐거운 너를 견딜 수가, 거리를 둘 수가, 없다. 지혜는 슬기에게서 부정하고 싶은 자신의 과거만을 보느라 지금 빛나는 그 애의 모습을 보지 못한 자신이 끔찍했다.   -윤이형, '여성의 신비' 중에서, p.170~171

무엇보다 이 소설집이 중요한 것은 박완서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8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가 남겨준 문학의 유산을 기리는 이들이 많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강화길 작가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할 때면 늘 박완서 선생님을 떠올린다고 말한다. 그녀의 작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위로가 된다고 말이다. 백민석 작가는 대학 시절 여자 동기들이 항상 박완서 선생의 책을 끼고 다녔다고 추억한다. 윤이형 작가는 박완서 선생이 여성에게 삶의 매 순간이 투쟁임을, 문학이 순응이나 타협이 아니라 격렬한 싸움임을 평생 온몸으로 체현하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경외심을 품는다. 임현 작가는 결코 쉽게 쓰일 수 없는 문장들이 쉽게 읽힐 때, 어떤 배려 깊은 다정함도 함께 읽게 된다고 말하며, 한유주 작가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정밀한 관찰로 삶에 대한 부감을 획득하는 소설의 교본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집은 이렇게 후배 작가들이 선배의 문학 정신에 대해 존경과 애정으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답신 같은 글들이기도 하다.

백수린 작가의 '언제나 해피엔딩' 속 주인공 민주는 스무 살 이후 자신이 살았던 삶이란 꿈꾸어왔던 것들을 조금씩 하향 조절하는 날들의 연속이라고 느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꿈을 잊어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극중 민주는 자신은 절대 늙어서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그렇게 될까 두려운 사람의 전형이라고 생각한 박 선생에게 무심코 자신의 불안한 속내를 내비친다. 이 시기만 지나면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냐고. 박선생은 말한다. 엔딩이 어떻든 언제나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 다음엔 다 괜찮아진다고. 영화관에서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끝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만 여기, 지금의 온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제목 그대로멜랑콜리해피엔딩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 스물 아홉 편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 담긴 생의 순간들을 통해 내 삶을 다시 한번 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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