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뼈의 아이들
토미 아데예미 지음, 박아람 옮김 / 다섯수레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순간 나는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센타로 아이들과 함께 사원 마당을 뛰어다니는 모습. 그의 금빛 눈에는 오로지 기쁨만이 가득하다... 그는 가만히 서 있고 마말라워가 그의 몸 여기저기에 아름다운 흰색 상징들을 그려 넣는다... 센타로들이 학살당한 뒤 페허가 된 곳을 둘러보며 그의 마음이 찢어진다... 난생처음 마법을 깨우는 의식을 치르며 그의 영혼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이 모든 장면이 사라지고 속삭임만이 남는다. 컴컴한 머릿속에서 오직 그 한 마디가 떠다니고 있다.

"살아라." 그의 영혼이 속삭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p.236

오래 전 오리샤 왕국에는 희귀하고 신성한 마자이족이 번영을 누리며 살았다. 열 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마자이들은 신들로부터 제각기 다른 재능을 부여 받고, 마법의 힘을 휘두를 수 있었다. 불을 일으키거나, 마음을 읽거나, 미래를 내다보거나, 질병을 치료하거나, 죽은 자를 불러오거나 등등.. 마자이는 태어날 때부터 새하얀 머리칼을 갖고 있는데, 모두가 날 때부터 신들에게 재능을 받는 건 아니었다. 선택 받은 아이들은 열세 살 이후부터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되는데, 11년 전부터 마법이 세상으로부터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일부 힘있는 자들이 마법을 남용하기 시작했고, 마법의 힘을 가지지 못한 코시단은 점점 마자이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로가 커져 결국 그들을 모조리 학살하기에 이른 것이다. 새하얀 머리칼을 갖고 태어났으나 부모와 마법을 한꺼번에 잃은 마자이의 아이들은 왕국의 최하층민으로 전락해 온갖 차별과 폭력 속에 살아가게 된다. 주인공 제일리 역시 여섯 살 때 왕이 보낸 병사들에 의해 엄마가 죽는 장면을 목격했고, 엄마처럼 검은 피부에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마자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왕에 의해 바다 깊숙한 곳에 버려졌던 성물이 발견된다. 세 개의 성물을 모아 신성한 의식을 치르면 사라졌던 마법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한다. 제일리를 비롯한 마자이들은 마법을 되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게 되고, 왕의 명령으로 왕자인 이난과 왕이 총애하는 총사령관 카에아가 그들을 쫓는다. 제일리는 그녀의 오빠지만 코시단인 제인과 성물 중 한 가지인 두루마리를 궁에서 훔쳐 쫓기게 된 아마리 공주와 함께 전설의 사원으로 향한다. 과연 그들은 무사히 왕의 추격을 피해 세상에서 사라진 마자이들의 마법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처음으로 이 남매가 얼마나 다른지 깨닫는다. 아마리의 얼굴은 둥글지만 왕자의 턱은 각졌다. 호박색 눈과 구릿빛 피부를 제외하곤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그건 아버지의 말이잖아, 오빠. 아버지의 생각이야. 오빠의 생각이 아니야. 우린 모두 저마다 독립적인 인간이야. 선택은 각자 해야 해."

"하지만 아버지 말씀이 옳아." 왕자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우리가 마법을 막지 않으면 오리샤는 무너질 거야."   p.349

이 작품은 스물세 살 젊은 신예작가가 서아프리카 문화와 신화를 바탕으로 창조해 낸 데뷔작으로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뉴욕타임즈 40주 연속 베스트셀러, 아마존 리뷰 1700개 이상, 31개 언어로 번역 계약, 21세기 폭스와 영화 계약 체결, 거기다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극찬한 소설이기도 하다. 마법 판자지 3부작의 그 시작으로, 두 번째, 세 번째 이야기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 현지에서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판타지 버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현실에 대한 은유가 아니더라도, 그저 판타지라는 장르로만 읽어도 매우 뛰어난 재미와 작품성을 지니고 있는데,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이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알레고리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지만 여전히 사회 주류는 백인 남성이고 수없이 많은 차별과 혐오가 작동하고 있는 곳이다. 소위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인종·계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사회 곳곳에서 차별로써 존재하며, 수많은 범죄와 부작용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아직도 무장하지 않은 흑인 어른들과 아이들이 경찰의 총에 맞는 사건이 벌어진다. 최근에 읽었던 앤지 토머스의 <당신이 남긴 증오>라는 작품도 흑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었다. 현대사회 내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편견과 무관심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첨예한 시선으로 그려 진정성있는 드라마를 보여 주었었다. 이번에 읽은 <피와 뼈의 아이들>이라는 작품을 쓴 토미 아데예미 역시 이러한 사건들을 뉴스를 통해 연일 접하게 되던 시절에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두렵고 화가 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함과 분노를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울 힘을 갖고 있다고,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서 울어 주길, 그리고 이제 일어나 작게나마 저항의 몸짓을 시작하길, 그리하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두 명의 젊은 흑인 여성 작가가 같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웠는데, 특히 토미 아데예미가 마법의 세계를 선택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판타지라는 가장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불가능의 문학을 통해 실제 현실 속 고통과 두려움, 슬픔, 상실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매혹적인 환상의 세계를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낸, 매우 놀라운 마법의 세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아프리카의 어디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검은 마법사들의 왕국, 그 동안 만나왔던 그 어떤 판타지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욱 어둡고, 더욱 아름다운 마법의 세계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어서 빨리 3부작의 다음 이야기를 만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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