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키
D. M. 풀리 지음, 하현길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은행에는 돈을 넣어두는 금고 외에 별도로 대여금고라는 게 있다. 사람들이 가장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물건일 수도 있고 말이다. 실제로 시중은행에서는 현금, 유가증권 등 귀중품을 맡길 수 있는 대여금고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 1억원 이상의 거래가 있어야 한다거나, 3억원 이상의 금액을 예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있어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경우는 없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대여금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그리고 있다. 20년 전 겨울, 파산 이후 무덤처럼 잠들어버린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 그리고 그 곳에서 수십 년 간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547번 대여금고. 과연 대여금고와 데드키를 둘러싸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는 1978년에 문을 닫았어. 믿기 힘들겠지만,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한밤중에 모든 문에 쇠사슬을 채웠대. 가구, 머그잔, 그림, 서류들을 몽땅 남겨두고. 그것들은 다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20년 동안 아무도 그것들을 몽땅 털어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야. 누군가가 이곳에 정말 신경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누가 텅 빈 건물에 무장경비원을 두겠어? 누군가가 그것들을 훔쳐 갈까 봐 걱정하는 것이 분명해. 이런 것들을 누가 훔쳐가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p.172~173

 

건축공학기술자 아이리스는 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입사 당시 최첨단 구조 디자인 프로젝트에 투입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3개월 동안 서류에 표식이나 끄적거리는 단순한 일만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참이다. 그런데 주초에 부서의 장이자 회사의 공동경영자인 휠러 씨가 그녀를 불러 이번에 특이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는데, 그녀가 현장조사를 포함해서 이 일에 적합할 거라는 동료들의 추천을 받았다고 말한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칸막이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아이리스는 기뻤지만, 사실 그 일은 업무 시간 외에 초과 근무를 하며 현장 임무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장소는 20년 전에 문을 닫은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였다. 당시 시 정부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했을 때, 수많은 사업장이 문을 닫고,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이 은행은 거의 20년 동안이나 건물을 폐쇄한 채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20년 전인 1978년 겨울, 십대 소녀 베아트리스는 나이를 속이고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에 면접을 보러 간다. 그녀는 그곳에 비서로 취직해 일을 시작하게 되고, 영화배우처럼 굉장한 미인인 맥스라는 친구를 사귀게 된다. 이모와 단둘이 살고 있는 베아트리스는 어느 날 이모에게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화려한 옷이 가득한 옷장과 편지들이 들어 있는 서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 비밀에 대해 제대로 알아내기도 전에 이모가 병원으로 실려 간다. 도리스 이모는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였고, 그 뒤로 베아트리스의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아서 거주할 곳이 없어지고, 도리스 이모가 가지고 있었던 대여금고의 열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맥스는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도리스 이모는 무슨 이유로 대여금고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리고 맥스는 왜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사라져 버린 것일까.

 

“왜 데드키라고 부르는 거죠?” 아이리스가 끝까지 물었다.

“대여금고가 여러 해 동안 열리지 않고 잠겨 있으면, 우린죽었다고 말해요. 대여금고가 죽으면, 그걸 비우고 다른 대여자를 받아야 하죠. 우린 데드키로 죽어버린 대여금고를 열고 자물쇠를 바꾸곤 했어요 지금은 드릴로 틀에 구멍을 뚫고, 틀 전체를 몽땅 갈아치우지만. 짐작하겠지만, 금전적으로는 엄청난 낭비죠."

“대여금고가 자주 죽나요?”

“깜짝 놀랄 정도로 자주요.”   p.457~458

 

이야기는 1978년 베아트리스가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에 근무하던 시절과, 1998년 아이리스가 폐쇄된 건물인 클리블랜드 퍼스트뱅크의 설계도 작성을 하는 20년 뒤의 현재가 교차로 진행된다. 은행 비서 베아트리스와 건축기술공학자 아이리스는 서로 같은 공간에서, 1978년과 1998년이라는 완전히 다른 시간을 통과하며 데드키를 손에 쥔 채 대여금고에 숨겨진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은행은 시가 파산하고 딱 2주 뒤에 문을 닫았고, 당시 직원들은 자신의 책상을 비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열쇠들은 분실되었고, 대여금고는 버려졌으며, 건물에는 20년 동안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아이리스는 군청이 건물의 매수를 고민 중이라 해당 건물의 개보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검사를 하고, 측정을 하고, 도면을 그려야 했다. 건물 경비원인 레이먼을 제외하고 15층짜리 고층건물에는 아이리스 혼자, 종일 일을 해야 했다. 그곳에서 아이리스가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의 공포와 숨겨진 비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게 되면서 생기는 긴장감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있다.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페이지 내내 아이리스와 베아트리스라는 두 인물을 주축으로 심리전이 펼쳐지는데,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다는 착각이 들만큼 빠져 들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2014년 아마존 브레이크스루 미스터리·스릴러 소설 부문 1, 2017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리더의 선택 소설 부문 1위로 채택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은 D. M. 풀리의 데뷔작이다. 저자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구조공학자로 일하면서 버려진 건물을 조사하는 동안 (소유자가 분명하지 않은 대여금고들로 꽉 찬) 지하의 금고실을 발견했고, 그 중 특별해 보이는 한 금고에 얽힌 미스터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가는 지금도 건물의 구조 문제를 조사하고 리모델링을 진행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는데, 바로 그러한 독특한 이력 때문에 이렇게나 방대하고 묵직한 두께의 놀라운 데뷔작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금기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이 수십 년의 시간을 넘나 들며 어떻게 괴물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비리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특별한 울림을 안겨 준다. 한 편의 매끈한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매력 만점의 데뷔작이었다. D.M.풀리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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