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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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불합리는 아주 잘 어우러진 형태로 공존한다.

영원히 교차할 일이 없는 철길과도 같다. 우리는 그 양족에 바퀴를 얹고 달리고 있다. 그래서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가가 무당에게 점을 보거나, 현실을 초월해야 할 종교가가 세금을 안 내려고 머리를 쥐어짠다. 인텔리전트 빌딩을 지으면서도 진지한 얼굴로 고사를 지낸다. 합리의 레일 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냉혈한이 되고, 불합리의 레일로 기울어지면 광신도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느 지점에선가 탈선하게 되어 있다.   p..88~89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적인 초기작인 <용은 잠들다>가 새로운 옷을 입고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에서 1992년 초판이 출간된 작품으로, 그녀가 1987 '우리 이웃의 범죄'로 데뷔했으니 초기작인 셈이다. 국내에는 2006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 국내에 그녀의 작품이 서너 편 정도만 소개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 읽었다면 이제 미야베 미유키다!'라는 당시 초판의 띠지에 실린 문구가 지금 보니 재미있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넘은 지금은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이 출간되어 있고, 확실하게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이있는 작가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니 말이다. 초판에 비해 판형이 약간 작아지면서 페이지 수는 오히려 더 두툼해졌다. 하지만 글자 크기라던가 배열 등은 초판보다 가독성이 훨씬 더 좋아졌다. 심플해진 표지 이미지가 독특한 제목의 느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남다른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초자연 미스터리이지만, 생각보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있다거나 화려한 스케일의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소소한 일상 미스터리에 가깝게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독성이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는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고 계시는 건가요?"

이나무라 노리오는 조용히 대답했다.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와 제 아내에게는. 그냥 그것이 거기 있는 겁니다."

무심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이나무라 노리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p.235

 

30년 만의 대형 태풍으로 인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쏟아 붓듯이 내리던 날 밤이었다. 잡지사 기자인 고사카는 고향집에 왔다가 가족들과 사소한 말다툼으로 화가 나서 도쿄로 돌아가겠다고 나온 참이었다. 이런 골치 아픈 날씨에 서둘러 돌아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며 후회하던 차에 길 한복판에서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자동차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태풍 한복판에서 자전거를 몰고 비에 흠뻑 젖은 신지라는 고등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를 집에 데려다 주려고 가던 중 도로 한 복판에 맨홀 뚜껑이 열려 있고, 활짝 펼쳐진 우산은 도로 옆으로 흔들리며 굴러가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를 찾는 어른을 만나게 되는데, 정황상 어린 아이가 누군가 열어놓은 맨홀 뚜껑 때문에 실족사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고사카는 기자로서 초등학생의 실종사건을 취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신지가 맨홀 뚜껑을 열어둔 두 명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은 자신은 물건이나 사람에게 남겨진 어떤 기억을 읽어낼 수 있는 초능력자, 사이킥이라고 고백하면서. 접촉하는 것만으로 마치 플로피디스크에서 정보를 읽어 내듯이 기억을 스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생각을 읽어 내고, 물건에 담겨 있는 주인의 감정이나 기억들을 장면들로 읽어내는 능력자가 등장한다고 하면, 사실 더 화려한 플롯과 스케일 큰 액션이 등장해야 할 것 같지만, 이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 가진 고뇌와 그들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인 신지가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이들을 지켜보고 판단하는 어른인 잡지사 기자 고사카이다. 이야기는 고사카의 시선으로 진행되며, 그가 신지의 능력에 대해 믿을 지 말지 고민하고, 신지와 같은 능력을 지닌 나오야라는 스무살 청년에 의해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백지 협박 편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주요 플롯이다. 아마도 신지와 나오야가 주인공으로 진행되었다면, 이 작품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선택한 것은 고사카였고, 그래서 초능력자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출판 편집자 스기무라 사부로가 탐정으로 활약하는 '행복한 탐정'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고사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동료간의 연애감정과 직장 상하 관계, 그리고 등장인물의 과거사까지 소소하게 드라마가 펼쳐지지만, 그 와중에 일곱 통의 협박 편지가 미스터리로 극에 긴장감을 부여 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 플롯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두 초능력 소년이 후반부로 가면서 특별한 연결 고리가 되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 나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 합리와 불합리가 생각보다 우리 일상에서 꽤나 많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를 믿는 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도, 믿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 미스터리의 진수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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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19-01-03 12:0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아무래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직업적 특성들로 캐릭터를 만드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