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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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여기저기 아프고 힘들어서 나 죽겠다, 못 살겠다, 하는 사람도 차분하게 자기가 딱딱 계획 세워서 저세상 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준다는 얘기야. 얼마나 좋아그래."

할머니는 끙, 하는 소리를 내고 일어나더니 함께 축배를 들자며 찬장에서 살구주를 꺼내왔다. 언니는 할머니의 과실주가 최고라며 잔을 날랐다. 위스키처럼 뿌연 금빛 술은 달콤한 향기가 났지만 온더록스로 마시기에는 묵직한 뒷맛이 부담스러웠다.  p.48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의 근미래, 대한민국에는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고, 결국 국민 투표를 통해 법안이 통과하게 된다. 이는 사망이 임박한 상태의 환자가 심폐소생술이나 인공 호흡기 착용 같은 인위적인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임종 과정에 돌입한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던 기존의 제한이 완화된다는 의미였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죽을 수 있도록 국가가 법적으로 허락을 하고, 그 과정을 돕는 다는 것이었다. 극중 지혜의 가족은 갑작스럽게 할아버지를 보낸 할머니의 폭탄 선언으로 이러한 안락사 문제를 고스란히 체감하게 된다.

"난 못해도 앞으로 오 년 안에, 나머지 싹 정리하고 개운하게 갈 거야."

할머니는 앞으로 오 년간 차근히 준비해서 개운하게 떠나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선언을 하고는, 스스로 신변 정리를 시작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이라는 것에 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죽음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해야 하냐고 가족들 입장에선 화가 나고, 서운하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할머니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와 이를 지켜보는 딸 지혜를 비롯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죽음 앞에 선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생각과 방식이 다양하게 보여지고 있어, 더욱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이다.

 

"널더러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걱정이 된다는 거지. 봐라, 부모 자식 사이라도 이렇게 내 맘 같지 않은데 남의 속을, 그걸 어떻게 다 헤아리겠니."

할머니의 말은 나무라는 투가 아니라 따뜻했고, 나는 괜히 코끝이 시큰거려서 고개만 끄덕였을 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뒤에 할머니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듯 내 손을 물리더니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내게 실망할 것 없다고 했다. 무슨 얘긴가 싶어 돌아보니 원래 담금주는 숙성시켜서 먹어야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p.121

인간은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 걸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거기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이성적인 답변이 있을까. 단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은 오게 마련이며,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는 것 정도는 다들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때라고, 죽음도 삶의 중요한 한 순간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사실 죽음이란 이십 대의 젊은이에게나 여든여섯의 노인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크기의 두려움과 같은 크기의 절망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란 무자비하지만, 그만큼 또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죽음이 누구라도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것이고, 언젠가는 마땅히 치러내야 할 일이라면 제대로 죽을 수 있도록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르테 한국 소설선작은책시리즈 두 번째 작품은 은모든 작가의 <안락>이다. 가볍게 지니지만 무겁게 나누며 오래 기억될작은책시리즈에 담긴 소설은 e-북과 함께 오디오북으로도 제공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고 나니 오디오북도 궁금해진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박솔뫼 작가의 <인터내셔널의 밤>은 배우 김새벽이 함께 하고, 은모든 작가의 <안락>은 배우 한예리가 함께 한다고 한다. 오디오북을 통해, 배우의 목소리로 들려지는 이야기는 텍스트로만 만나게 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자아낼 것 같아 궁금하다. 그리고 이어 출간 예정인작은책시리즈의 라인업 또한 그 이름만으로 기대감이 들게 하는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강화길, 정지돈, 김솔, 백민석, 정용준, 박민정.. 요즘 가장 핫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작가들의 신작들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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