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곡예사에게 중요한 것은 기술적인 숙련도뿐만이 아니었다.
관객들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타고난 재주와 성품이 무엇보다 우선이었고, 곡예사의 몸짓 하나에 자신의 목숨이 달린 것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단순히 외모가 아름답고 성품을 갖췄다고 해서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제 아무리 외모가 빼어난 여자라고 해도 이를 뒷받침해 줄 순수한 신체적 기품과
민첩성, 강인함 없이는 첫
번째 시즌을 무사히 넘길 수 없었다. p.146
1944년, 독일, 열여섯 노아는 독일 군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다. 그녀의 아빠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절게 된 것을 자부심으로 여길 만큼 네덜란드인으로서 애국심이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딸아이가 독일
군인과 저지른 만행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노아는 기차역에서 청소를 하며 생계를 꾸리다 출산을 하지만, 아이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디론가로
입양된다. 그렇게 자신이 낳은
아이를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빼앗기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날 갓난아이를 가득 실은 유개화차를 발견하고, 빼앗긴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 중 하나를 안고 눈 덮인 숲으로 도망친다.
그렇게 유대인 아이를 키우게 된 노아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겨우 독일 서커스단에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1942년,
독일,
수 세대 동안 이어져 내려온 유명한 서커스 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아스트리드는 독일군 장교와
결혼하기 위해 가족들 곁을 떠났었다. 그와 결혼해 베를린에서 생활한지
5년이 접어들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남편은 군수품을 관리하는 자리로 승진한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계속 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상부에서
유대인과 결혼한 장교들에게 이혼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게 된다.
남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그녀에게 이혼을 해야겠다고 말한다. 당장 독일 밖으로 떠나야
했지만, 가족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그때 그녀의 가문과 소문난 라이벌 관계였던 노이호프의 서커스단에서 그녀에게 함께 일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마침
서커스단의 공중곡예사가 부상을 당해 연기자가 필요하다면서.
그렇게 아스트리드는 서커스단에서 주연 곡예사로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최근까지만 해도 서커스는 포탄이 오가는 전쟁에서 유일한 안식처였다. 마치 외부에서 벌어지는 세상사와 동떨어진 하얀 눈이 날리는 스노볼
세상처럼. 하지만 그 벽마저
금이 가서 부서지기 직전이 되어 버렸다. 다름슈타트에서 프랑스에 도착하면 안전해질 거라고 말했을 때 아스트리드가 보인 반응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그 어느 곳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p.266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노아는 부모님에게,
아스트리드는 남편에게 버림받았고, 두 사람 모두 가족을 잃어 버렸다. 어떤 면에서는 처지가 닮은 두
사람이지만, 나이도, 성격도, 배경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커스단에서 서른아홉의 아스트리드와 열일곱의 노아가 만난다. 서커스 단장인 노히호프 씨는 노아를 이곳에 머물게 하는 대신 공중 곡예를
시키겠다고 선언한다. 순회공연
때까지 6주가
남았지만, 그렇게 단기간에
아무 가능성도 없는 애를 훈련시킨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렸다.
갓난아기를 자신의 동생이라고 속인 노아가 탐탁치 않은 아스트리드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훈련시키기로 한다. 유대인인
자신을 숨겨 주기 위해 서커스 전체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훈련은 맡았지만, 아스트드리드는 노아가 며칠 도 못 버티고 그만두겠다고 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비밀과 반감으로 인해 라이벌처럼 시작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끈끈한 연대감을 쌓아 특별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위험한
시대였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었던 이들에게 거짓말과 상처와 비밀이란 너무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목숨을 끊기도 하는 그런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암울하고, 무섭고, 외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서커스단이라는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상적이지 않은 소재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객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아기가
가족 품에서 떨어져 집단수용소로 이송되었다는
'이름 없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와,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무렵 유대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해 준 독일 서커스단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전쟁 중에도 계속된 서커스 곡예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불의에 맞서 싸운 용감한 이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이 뭉클하게 와 닿았다. 서커스의 마법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작품이고, 슬프고, 감동적인
역사 로맨스 소설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저자인 팜 제노프는 이 작품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을 여러 편 발표했다고
하는데, 그녀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