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죽여본 적 있습니까?
불현듯 떠오른
장면. 서서히 꺼져가는
강아지의 까만 눈동자와, 아스팔트와 흙에 스며드는 검붉은 피.
죽인 것과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둔 것은 질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 윤은 잠시 생각했다. 윤은 잠자코 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는 푸석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p.116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현직 국회의원들 열두 명이 죽었다.
그날은 전당대회가 있었고 식사를 마친 의원들은 온천에 갔다. 경찰이 도착했을 땐 타일 바닥 곳곳에 피가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었고, 붉게 변한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는 고요한 표정의 남자, 그는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었다. 수사관들은 의도와 배후 세력을
물었고, 의사들은 그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려고 했지만, 그의 답은 간결했다.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게다가 그의 지문은 등록되어 있지 않았고 주민번호도 없었으니, 당연히 그는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그는 사이코가
아니었고,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지도 않았다. 수사는
난항이었고, 방송에서는 연일
미스터리한 그의 존재에 대해 방영했고, 사건을 다각도로 분석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는 항소하지 않았으며 대법원까지 가지 않고 1심에서 판결을 받아들였다. 형은 확정되었고 교도소로 이송되어 사형수를
지칭하는 붉은색 명찰을 붙였고, 474번을 부여 받았다.
그렇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수감번호 474번과 그의 담당
교도관 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474번이라는 캐릭터는 범행 동기는 전혀 알 수 없고,
죄를 받아들이고 모두 인정하지만, 뉘우치고 반성하는 태도는 아닌, 지나치게 여유롭고, 너무도 깔끔한, 기묘한 인물이었다. 교도관들은 그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찜찜하고, 불안했고, 언론에서도 그와 관련되어 색다른 사실 하나라도 잡아 보려고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윤은 474번의 담당 교도관으로서 그를 매일
만났다. 가까이에서 느낀 건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성실하고 착실한 수형자라는 거였다.
그럼에도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속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에게서 뭐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의 작은 행동과 표정 속에서 작은 기미라도
찾으려 애를 썼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많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지만 사람을 죽입니다. 어떤 이는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못합니다. 그는
그런 이들을 대신해 손이 되고 칼이 되었습니다.
원하지 않고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지요. 그는 지금도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법은 일어난 일의
결과로 죄를 판단합니다만 사실 인간은 결과로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의도가 죄죠.
p.127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일곱 번째 책이다. 정용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악은 타고나는
것’이며 ‘악에는 이유가 없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절대 악과 절대선은
무엇이며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474번은 사수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냥을 잘했다고 한다. 그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죽였는데, 생명을 빼앗는 일을
좋아하거나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누구보다 그걸 잘했기 때문에 일로서 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기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맡은 일을 실패한 적도
없었다. 문제는 그에게
죄의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는데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남자는 괴물인 걸까?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 같은 게
없다면, 의도도, 목적도, 욕망이나
쾌감도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그저 본성이었다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각증
환자이자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청부살인업자,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도 없이 존재 없는 비존재인 유령으로 살았던 그를 접견하겠다고 찾아온 한
여자. 자신을 고아라고 말했던
그의 실재하는 가족인 누나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존재성이 부여된다.
그리고
474번,
신해준은 자신의 사형을 집행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도관들과 수형자들을 죽이겠다고. 사형의 딜레마는 혹시 있을 오판과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길 원하는 인간의 인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 형 집행을 미룰 근거가 없다. 문제는 그를 사형시킨다면 사형 폐지 국가라는 잠재적 위상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므로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살인을 저지른 죄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마치 공범처럼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괴물처럼 등장했던
474번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고, 그의 존재성이 구체화되면서 악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낯설고
혐오스럽지만, 어떤 부분에선
익숙하고 이해할 만한 지점의 끝에 '악'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악에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악에는 너무도 많은 이유가
있다'라는 생각도
든다. 악과
악인,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