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나에게는 요리하는 것도 하루하루의 즐거움 가운데 중대한 요소다. 다른 집안일은 그저 필요하니까 할 뿐이지만 요리를 하는 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손이 많이 가고 기교가 필요한 요리는 못 만들지만 자두나 딸기, 복숭아 잼을 만들거나 빵과 달걀과 우유에 바닐라를 넣은 따끈한 과자 얼음사탕을 뜨거울 때 녹인 차가운 홍차 등은 자주 즐긴다. 매년 7월에는 솔덤 자두의 껍질을 멋기고 씨를 뺀 뒤 체에 걸러서 적포도주에 섞은 음료를 만든다. 위스키만 마시는 술고래 아들도 감탄하며 칭찬할 정도로 어른스러운 리큐어다.    p.72

모리 마리는 환상적이고 우아한 세계를 표현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인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다. 나쓰메 소세키와 쌍벽을 이룬 대문호인 아버지(모리 오가이)를 두고 남부럽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성년이 된 이후 두 번의 이혼과 가난한 살림으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게다가 생활 능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성격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자신만의 소소한 행복을 만들며 살았다. 그녀는 매일매일 자신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만들었고, 하루 세끼 식사를 맛있고 근사하게 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외롭거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콩소메와 콜드비프, 감자를 넣은 채소샐러드를 먹고, 어린 시절 만났던 메이지풍 서양요리와 양배추 말이를 좋아한다.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불끈 화가 치밀어 올라 씩씩거리며 화난 채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 와서도 화를 낸다. 요리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잘하지만, 본격적인 요리법으로 음식을 만들지는 않고 만사 귀찮아하는 편이라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방법으로 요리를 하곤 한다. 게다가 반드시 자신이 생각한 대로의 요리를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해서 먹지 않으면 아무래도 싫다며, 그 싫은 정도가 좀 병적일 정도로 심하다고 스스로 어느 정도는 미치광이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괴짜 미식가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는 나 역시 훌륭한 식도락가다. 넘치게 훌륭해서 훌륭함이 거스름돈을 내줄 정도다. 젊은 사람이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누가 노인이라 부를 때 아니라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먹는 걸 좋아하기로는 여전히 아이 못지않다. 그런데 나는 아주 마음에 드는 요릿집에서도 내가 만든 요리가 더 맛있다고 느낀다. , 내가 가는 요릿집을 변호하자면 그 가게에서는 내 지갑 사정에 걸맞은 가격으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버터를 넉넉히 집어넣을 수도 없고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안심이나 등심 같은 식재료를 쓸 수도 없다.   P.188

괜찮아, 먹고 싶은 건 매일 있으니까!라는 말은 모리 마리의 인생 모토와도 같다. 두 번의 이혼과 정리가 안 되어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 집에 살면서도, 정작 그 속에 사는 당사자는 무사태평이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러니까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와 상관없이 지금 그대로 충분히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 유리를 정말 좋아해서 초록색 얇은 컵에 음료를 따르고 그 가장자리에 입술을 댈 때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라면 며칠 동안 풀로 된 밥상으로만 지내는 것도 아무렇지 않으며, 장미꽃이 새겨진 화려한 찻잔에 홍차를 달여 마시는 순간으로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행복해진다.

모리 마리가 들려주는 맛있는 음식과 요리에 대한 글은 그녀의 소소한 일상들과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린 아이인 채로 몸만 어른이 된 사람이라는 평가처럼 시종일관 철없고 제멋대로에, 하고 싶은 건 기어이 하고, 하기 싫은 건 떠넘기는 뻔뻔한 모습도 매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녀만의 확고한 행복에 대한 가치관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실 생각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항상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그러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놓치고 마는 현대인들의 생활 패턴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당당하게 어른스러워지지 않는 모습을 내보일 수 없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모리 마리의 이러한 모습이 다소 뻔뻔하고, 철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충분히 자신만의 소확행을 추구하고 멋지게 살고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밥상은 작은 우주와 같다. 사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다. 음식만큼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또 있을까. 게다가 요리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상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모리 마리의 이 책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그런 포만감과 행복감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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