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가 되기
존 가드너 지음, 임선근 옮김, 레이먼드 카버 서문 / 걷는책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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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잘 쓴 소설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첫 페이지 다섯 단어만 읽고도 이미 자신이 지면에 인쇄된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장면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쓰레기통들을 뒤지고 다니는 개들, 알래스카 산악 지대 위를 선회하는 비행기를, 파티에서 슬그머니 자기 냅킨을 핥는 노파를. 내가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지, 점심때가 되었는지 일할 시간이 되었는지 따위는 잊고 몽상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p.42

레이먼드 카버는 아내와 두 어린아이를 데리고 월세 25달러짜리 낡은 집을 얻는다. 이사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해서 배달원으로 일했던 약국의 약사에게 돈을 빌려서 겨우 댔을 정도로 빈털터리였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암담했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계획은 치코 주립 단과대학에서 강의를 듣겠다는 거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왔던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그만 때려치우라고, 꿈 깨라고, 조용히 마음 바꿔 먹고 다른 일을 하라고 시시때때로 속삭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 강의에 수강 신청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강의를 통해서 그를 가르쳤던 교수가 이 책의 저자인 존 가드너였다. 레이먼드 카버가 비좁은 집에서 애들과 함께 지내느라 글 쓸 공간이 없어 애를 먹고 있을 때, 자신의 사무실 열쇠를 주었던 이도 바로 존 가드너였다. 레이먼드 카버는 이 책에서 자신의 멘토를 추억하는 가슴 저릿한 서문을 썼는데, 그의 꾸지람과 너그러운 추임새를 받았으니 나는 최고로 운 좋은 사람이라고 그를 추억하고 있다.

이 책은 뛰어난 미국 현대 소설가로 손꼽히는 존 가드너가 20여 년 동안 대학 안팎에서 창작 교사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 창작 입문서이다. 장편소설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진지한 새내기 작가들을 위해 쓰인 이 책은 1983년 가드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소설가의 삶이 어떠한지, 소설가가 안팎으로 경계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대체로 기대치를 어느 수준에 두는 게 적정한지, 대략 어떤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줌으로써 그들에게 합당한 안도감을 안겨주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창작 입문서가 아니라 저자가 작자로서 또 창작 교사로서 겪은 지난한 과정과 그가 지켜온 단호한 도덕성을 보여주는 진솔한 고백이기도 하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적확한 몸짓, 숨 막히도록 적합한 비유, 벽지 또는 고양이의 움직임에 대한 간결한 묘사, 문장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빛나거나 감동적인 문장, 허구지만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 등 진짜배기 대목들이 나와야 한다. 인물이나 장면이 그것들 자체의 기이한 힘으로 현실로 쳐들어와서, 자기가 쓴 글이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경험, 그리하여 작가가 자신이 창작자가 아니라 한갓 도구적 존재, 마법사나 주술에 걸린 사제라고 여기게 되는 경험-마법을 구동해보는 이런 경험이야말로 작가를 창작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중독자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p.227

글쓰기, 창작, 작법에 관한 책은 꽤 많이 읽었던 편인데, 여타의 책들에 비해 이 책은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아서 사실 좀 의아했다. 어떻게 소설가가 되어야 하는지, 글쓰기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면 결코 이 정도 분량일 수가 없을 텐데 싶었던 거다. 게다가 '장편소설' 이라 하면 그 과정이란 더욱 복잡하고, 지난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드너는 이 책에서 작가가 되고 작가다움을 유지한다는 게 어떤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돌아보게 하는 지혜롭고 정직한 잣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장편소설 쓰기에 관심이 있고, 진지하게 소설가가 될 마음을 먹은 이들이 아니더라도, 소설과 작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들을 위해서도 매우 훌륭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그렇다고 작법과 관련된 이론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드너는 자신의 작품과 경험담, 혹은 다른 작가의 작품이나 가상의 작품 등을 사례로 들어가면서철두철미하고 유용한이론과 실제를 들려 준다. 뿐만 아니라 작가 워크숍이나 창작 프로그램, 대학의 문학 혹은 비문학 교육,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알아야 할 점, 편집자와 에이전시의 역할, 작가로 살면서 생계를 꾸리는 방법 등에 대한 조언도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이 쓰인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왜 이 책을 '불후의 고전'이라고 하는 지 알 것도 같다. 작가들이 왜 이 책에 밑줄을 긋고 주석을 달면서 거의 외울 만큼 읽었다고 하는지 이해가 될 만큼, 작가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만 임팩트있게 담고 있는 책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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