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임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여자의 말이 맞았다. 동희는 미국에 살아도 한국에 나와 있는 지금도, 뭐가 하나는 쑥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뭘까. 그 커다란 빈 구멍은. 한국 국적을 재취득하면 좀 나아지려나. 동희는 자신도 모르게 상념에 빠져들었다.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더라고. 체류 기간 2년 동안 잘 생각해봐요."    p.30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그곳에서 살던 동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면 한국 국적은 자동 상실된다고 하니, 그녀는 이곳에서 국적상실 신고를 하든 국적 재취득을 하든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냐고 묻는다. 한국을 떠날 때 왜 떠나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와 비슷한 말을 미국에서도 들었다. 왜 미국에 왔냐고, 왜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왔냐고, 왜 힘들게 정착한 미국을 다시 떠나려고 하느냐고. 동희는 그때마다 단답형의 대답을 찾아보려 했지만 늘 명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유 같았고 모든 것이 이유가 아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원래 그렇게 명쾌하거나 속 시원한 대답을 안겨주지 않는다. 사실 어디에 사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극중 동희가 만난 여자의 말처럼 어디에서 죽느냐가 문제일 수도 있겠고, 어디에서 살든 어떤 모습으로 현재를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든 혹은 거기든,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꾸 경계에서 서성거리게 되는 삶일 지도 모르겠다. 임재희 작가는 이 작품에서 한국인 이주민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민자의 삶'이라고 하니 제일 먼저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인 이창래 작가가 떠오른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했고, 이후 그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그는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존재들을 소설 속에 등장시키면서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아마도 이민자의 삶이란 그런 모습일 것이다.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 해도 그 안에 스며있는 문화의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곳에서 그곳의 언어로 생활하고 그곳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확인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평생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이란 얼마나 공허할까. 얼마나 서글플까. 소속감이라는 것이야말로 타인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뭉클한 온도인데 말이다.

어쩌면 엄마가 정작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집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긴 여정을 생각하는 시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문득 자신들도 길 위에서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떠올렸다. 태엽이 감긴 인형들처럼 움직임을 멈춘 적이 없었다. 계속 학교라는 곳을 다녔고, 계속 무언가를 배웠고, 계속 시험이라는 것을 치렀고, 계속 보이지 않는 적들을 만났다. 부모의 갈등을, 병을, 상처를, 분노를 헤아릴 여유도 없이 마주치고 흡수했다. 언제부턴가 각자의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오고 있었고, 그래야 한다고 여겼다.    p.236

'라스트 북스토어'에서 동생 부부가 사는 미국에 여든을 훌쩍 넘긴 노모를 모시고 다니러 온 나는 엘에이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헌책방에 간다. 알고 보니 올케는 우울증약을 먹어야만 겨우 일상을 버티는 중이었고, 그런 아내와 함께 피아노를 전공하는 딸과 이제 대학에 들어간 아들을 키우는 일은 동생에게 만만치 않아 보인다. '천천히 초록'에서 어정쩡하게 미국에서 살다가 어정쩡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사는 나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부모의 흔적을 되짚는 중이다. 그녀는 말한다. 왜 그렇게 오랜 세월 한국을 떠나 살다가 되돌아왔냐고 묻지 말라고. 뭔가 실패한 기분이라고. 이민 가서도 비슷한 질문을 숱하게 들었다고. 이제와 한국에서 삶을 다시 살면서 시간의 한 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듯한 느낌이 든다고. 머리와 다리만 있는 몸으로 사는 느낌, 그런 기분은 대체 어떤 걸까. 그래서 나는 그 지워진 부분이 뭔지 찾기 위해 고향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남편과 이혼한 뒤다른언어를 쓰는 곳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꽃집 여자, 어린 나이에 미국에 입양된 소년, 한국인 엄마를 뒀지만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한 남자 등 한국에 머물러 있지만 한국 사회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이 자신의 근원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민자는 '미국으로 간 이민자',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자', 그리고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경계인 혹은 주변인, 세상으로부터 어딘가 배제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 한 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어딘가를 떠도는 그들의 삶. 하지만 저자는 극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도 미국도 아닌 현재 서 있는 곳"이 결국 내가 실존하는 그 곳이라고. 실제로 저자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 스물 한 살 때 하와이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대학 생활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미국인과 한국인의 중간에 선경계인’”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영어로 의사소통은 하지만 거기에선 아무런냄새도 나지 않으며, “한국어는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고 하니,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풍경들은 모두 실제 그것을 닮아 있을 것이다. 떠나는 자, 돌아온 자, 머무는 자들이 자신의 근원을 향해가는 여정은 그리하여 쓸쓸하고, 고독하지만, 누구나 상실을 겪어 왔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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