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첫째로 여러 사람들이 점심을 함께 먹기 위해 에이브이로 왔다. 그것은 단지 점심을 함께 먹는다는 의미 이상이었다. 평범하거나 저명한 많은 사람들을 점심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힘의 원천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
크리슈나무르티의 존재였다.
거기에 잘 차려진 식탁의 아름다움, 맛있는 음식,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멋진 대화가 결합해 아주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p.137
크리슈나무르티는 20세기에 가장 훌륭한 철학가이자 정신적 스승으로 간주되는 명상가이자 인도철학자이다. 그는 어떠한 계급, 국적,
종교 그리고 전통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말하며 죽을 때까지 60여 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강연을
했다.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크로닌은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해에 태어나서 부모 세대가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간접적으로 목격하며,
진리 탐구라는 관심사를 따라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을 담은 책을 접하게 되면서
인도, 스위스, 영국
등지에서 열리는 그의 강연을 직접 찾아 다니게 된다.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가 설립한 교육 기관인 오크 그로브 학교에서 요리사로 일하게
된다. 사실 그는 요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바로 그런
이유로 더 다양한 채식 요리법들에 대해 천천히 공부하고,
깊이 있게 파고들게 된다.
허브들과 양념들,
분량 정하기,
재료 자르기,
휘젓기와 맛보기에 대해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그는 채식 요리법으로 음식을 차려내야 하는 새로운 역할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 책에는 저자가
크리슈나무르티의 식탁에 차려낸 채식 요리 레시피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각 장마다 전채 요리,
주요리,
디저트가 간단한 레시피,
재료와 함께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텃밭에서 갓 수확한 다양한 야채들로 만든 그린 샐러드와 레몬즙을 살짝 뿌려 낸 체리 토마토와
얇게 자른 아보카도로 전채 요리를, 구운 얌과 아홉 가지 콩 수프,
올리브 오일과 마늘을 넣고 볶은 신선한 시금치 잎이 주 요리가 되고, 휘핑크림을 곁들여 낸 애플 크럼블과 신선한 제철
과일이 디저트가 된다. 기존에
우리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채식 요리들이라 평소 채식에 관심이 있거나 아직 시도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면 책 속의 레시피를 통해서
한번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생각보다 더 다양한 채식 요리들이 소개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웠다.
나는 다양한 요리들을 가리키면서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물론 토스트 그린 샐러드가 있고, 파스타 샐러드와 아보카도 샐러드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보카도, 토마토, 양파, 파프리카를 넣고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구운 감자가 있고요. 채썬 주키니와 치즈로 만든 키슈를
준비했답니다. 라타투이 비슷한
채소 요리와 함께 먹습니다. 이 요리는 주키니, 가지, 토마토소스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내 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들까지 그토록 예리한 관심을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는 항상 놀라곤 했다.
p.278
정신적인 스승, 마음 속으로 깊이 존경하는 인물 가까이에서 그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다. 저자는 크리슈나무르티의 태도와
제스처, 음식을 먹는
모습, 곁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고, 웃고, 혹은
침묵하는 모습, 그리고
사람들을 조용히 응시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무척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우리도 간접적으로 크리슈나무르티라는 한 존재의 여러 면모를
느끼게 되는데, 그의 사상이나
철학에 대해 잘 몰랐던 이들이라도 대번에 매혹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워낙 전세계를 돌면서 수많은 강연을 해왔기에,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매우
드라마틱하고, 커다란 깨달음을
주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 생각들은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이해를, 때로는 놀라움을 안겨 준다.
'세상에 정의란 없다.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어들에 의해 살아가고 있고, 단어들은 우리의 감옥이 되어
버린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만 힘을 쏟는 것은 삶을 부정하는 일이다'
등등...인간 마음의 본성을 탐구하고 핵심 개념들을 명쾌하게 정의하는 문장들도
인상적이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통찰을 표현하기 위해 시종일관 간명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했으며,
시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저자가 그의 언어 사용이 유연하고 탄력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 책
속에서도 그런 부분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진지함은 마치 바위 같아서 어떤 것도 그것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머와 웃음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존재 안에 자리잡은 업과 번뇌의 틀을 깨려면 최소한
‘1000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단순히 크리슈나무르티의 삶과 그의 가르침을 선망하는 추종자로만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저자가 그와 10여
년간 점심 식사를 함께하면서 그의 존재를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고 있는 이 책은 술술 읽히지만, 책장을 덮고 나서도 긴 여운을 남겨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