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P.75~76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읽었거나 배운 것은 대부분 실전에선 적용되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열아홉에 사랑을 경험하든, 서른에 사랑을 하든, 마흔이 넘어서 사랑을 만나든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므로, 상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줄리언 반스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그것이 여전히 잊지 못할 첫사랑이든, 고백도 못해본 짝사랑이든, 처참하게 배신당한 지독한 사랑이든 간에. 모두에게 자신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그게 바로 단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단 하나의 이야기, 사랑의 시작과 끝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한 남자가 오십여 년 전의 첫사랑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열아홉 청년이 마흔 여덟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들의 이야기는 테니스 클럽에서 시작되었다. 추첨식 혼합복식 대회가 열렸고, 제비 뽑기로 파트너가 결정되었다. '제정신이 아닐 정도의 자신감'으로 충만한 19세 청년과 스스로 '다 닳아버린 세대'에 속한다고 믿는 48세 여인이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두 번째 애인이었다. 폴은 삼학기가 끝날 무렵 대학에서 만난 여자아이와 성적인 입문을 했던 적이 있고, 수전은 아이가 둘이었고 사반세기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 이제 막 어른이 되려 하는 열아홉 청년과 오래 전부터 어른이었던 마흔여덟의 여자가 만드는 사랑은 생각보다 순수하고, 아름답고, 하지만 깊은 슬픔과 예리한 진실이 담겨 있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수전의 남편이 그녀에게 수시로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폴이 알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폴은 그녀를 구해내고 싶었고, 결국 런던에 집을 구해 함께 떠나기에 이른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환상에서 현실이 되고, 로맨틱한 관계에서 일상의 남루함을 겪게 되는 관계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너는 스물다섯이고, 이런 종류의 상황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신문에는 '중년의 여성 알코올중독자 애인을 감당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없다. 너 혼자 알아서 해야 한다. 너는 아직 인생의 이론이 없고, 그 기쁨과 고통 몇 가지를 알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랑을 믿고,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을 믿는다, 사랑이 어떻게 인생을, 실제로 두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너는 사랑의 상처받지 않는 면, 끈질김, 어떤 적도 따돌리는 능력을 믿는다. 이것이, 사실 지금까지 너의 유일한 인생의 이론이다.   p.224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각 장마다 화자의 시점이 달라진다. 일인칭 ''로 시작해서 이인칭 ''가 되었다가 삼인칭 ''가 되고는, 다시 ''로 돌아온다. 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에는 오로지 나와 상대만 보이고, 주변의 모든 것들은 뿌옇게 흐려지곤 하니 말이다. 우리는 사랑이 끝나고 나서야 타인의 시선이나, 객관적인 시각에 대해서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다. 나의 사랑이 끝이 나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이어지니깐. 일인칭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들이 함께 런던으로 떠나게 되는 부분까지이다. 그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이 일에 대한 내 기억은 이게 다였으면 좋겠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하지만 가능하지가 않다' 사랑의 여러 단계 중에 이제 그들은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폴은 남편의 그녀에 대한 폭력 때문에 분노와 연민과 공포를 느끼면서 동시에 무력감 비슷한 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그녀가 가정 폭력으로 인공치아 네 개를 만들면서 폴의 그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점이 이인칭으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이후에 겪게 되는 것들은 지금이나 나중에나 폴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한 작품에서 이렇게나 시점이 많이 달라지는 것도 드물지만, 그로 인한 효과가 이렇게 놀라운 작품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이야 항상 문장이 좋았지만, 특히나 이번 작품은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결국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붙어서 책이 두툼해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수많은 연애 소설을 읽어 왔고, 수많은 연애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왔고, 수많은 연애에 관한 잠언들을 읽어 왔지만, 그 어느 것도 줄리언 반스의 이 작품만큼 진실에 가깝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신이라면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당신은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보다는 사랑하고 잃어본 것이 낫다'라고 생각하는가. 처음의 질문도, 두 번째 질문도 사실 우리가 선택할 여지는 없는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길을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불가항력에 가까운 거니까.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질지 아닐지 선택하거나, 얼마나 사랑할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번 '기꺼이'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되는 지 잊어 버리고선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단 하나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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