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를 잡다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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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의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몸에 칼을 대려고 할까? 수술이 끝나면 환자는 생사의 기로에서 밤새도록 사투를 벌이는데 어떻게 수술한 의사는 잠을 잘 수 있을까? 수술이 아무 실수 없이 끝났더라도 환자가 그 수술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면 의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외과 의사는 죄다 정신 나간 사람들일까, 아니면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거나 양심이라곤 없는 자들일까? 그들은 영웅일까, 아니면 그저 과시욕에 찌든 사람들일까?  p.19

의학의 역사, 그것도 수술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해서 사실 어느 정도는 정보 위주로 딱딱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 용어들이 가득해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너무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저자가 현직 의사라고 해서 진료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감상을 담고 있는 에세이 같은 종류의 글일 거라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이 책은 굉장히 복잡하고, 전문적이면서도 유쾌하고 흥미진진하다. 네덜란드의 현직 외과 전문의인 아르놀트 판 더 라르는 세상을 바꾼 수술에 대해, 그 매혹적인 역사를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사례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며, 역사 자료와 인터뷰, 언론 보도 내용, 전기 등 그 인물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게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모두 외과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어 더 매혹적이다.

목차만 보자면 마치 의학 전문 서적이라고 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1장 결석 제거술, 2장 질식, 3장 상처 치유, 4장 쇼크...... 16장 대동맥류, 17장 복강경 검사, 18장 거세 등등... 그리고 각 장에 사례로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나 알만한 역사 속 유명인들이다.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머리에 구멍이 나고 피로 뒤덮인 채 의식이 없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역사적인 기관 절개술을 시행했던 의사들의 수술 현장부터 특이한 병과 사인으로는 따라올 자 없었던 교황들의 연대기, 출산의 고통을 참지 못해 수술에 마취가 도입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낸 빅토리아 여왕과 대동맥류에 걸리고도 예상보다 7년을 더 살아수술의 상대성을 몸소 보여 준 아인슈타인 등 보통의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가 일하는 방식은 범죄를 해결하는 형사들의 방식과도 동일하다. 즉 의사가 환자에게 생긴 문제를 찾는 것과 형사가 범인을 찾는 것에는 닮은 부분이 있다. 병의 원인을 가리는 것은 곧 범죄의 동기를 찾는 것과 같고, 병이 어쩌다 생겼는지 찾는 과정은 살인자의 범죄 순서를 추적하고 살인 무기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찾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형사마다 자신만의 수사 방식이 있듯이 의사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수께끼를 풀어 간다.   p.183

각각의 유명 인물들에게 실제 벌어졌던 일화들은 그 내용 또한 매우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상황을 모두 포함해서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에 의해 살해 당한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는 칼에 찔리고도 다시 일어나서 모자를 쓰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원래 일정대로 배에 오르기도 했다. 사후 부검 결과 칼은 폐를 지나 심장을 거의 전부 관통했고 그 결과 내출혈이 발생한 상황이었음이 밝혀졌는데, 대체 심장이 이 정도로 심하게 다친 사람이 어떻게 걸어가 배에 오를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학적인 분석을 볼 수 있다. 특히 재미있었던 대목은 12 '진단' 편이었는데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의 역할과 그들이 진단하는 방식을 애거사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현대 의학의 진단법을 매우 구체적이고 단계적으로 설명을 해주면서, 에르퀼 푸아로의 귀납법과 셜록 홈즈의 연역법을 그 사례로 보여주는 것이다. 외과 의사와 내과 의사가 다른 방식으로 잠정 진단을 도출하는 것처럼 푸아로와 홈즈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가장 재미있는 역사서였고, 가장 쉬운 의학서였으며, 가장 매혹적인 과학서이기도 했다. 수술의 역사와 그에 따른 여러 사례들을 읽으면서, 의사라는 존재와 그들이 하는 의술의 역할에 대해서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일반인도 의학의 세계에 대해 이 정도만 알고 있다면 우리의 몸과 질병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에필로그에는 저자가 '미래의 외과 의사 톱 10'이라는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그 대상들이 고전 SF 작품에 등장했던 외과 의사들이라는 점이 또한 흥미로웠다. 미레 셸리의 빅터 프랑켄슈타인부터 영화 스타트렉의 레너드 맥코이 등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데, 에필로그를 읽다 보면 미래의 외과 의사가 앞으로 얼마나 더 기이하고 멋진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정도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이 책은 의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기존에 읽어 왔던 의학 관련 에세이나 전문서, 온갖 종류의 역사서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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