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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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펼쳐진 꽃밭 같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직 꽃밭을 뒹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런 삶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족속들인가? 얼마나 큰 운을 안고 태어났기에 그런 삶을 사는 것일까? 이하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던져본 적 없는 일련의 질문을 파리에서의 일주일간 차례로 던져보았고, 또 약간의 답을 얻기도 한 기분이었다.    p.138

이 작품에는 재벌 2세 남자 주인공, 그와 결혼하는 준비된 여자, 그리고 그가 바람을 피우는 평범한 여자가 등장한다. 스토리만 보자면 티비 드라마의 단골 소재,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사과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매우 낯설다.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어느 정도 뻔한 전개로 진행되는 풍경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소재를 가지고 말이다.

“모든 것은 지나치게 그럴듯했다

우선 '영화나 소설에서나 접할 수 있는 상상 속의 '부르주아'처럼 행동하는, 고도로 계산된 듯한 인공적인 태도' 그대로 등장하는 재벌이 등장한다. 대기업 오손그룹의 정대철과 은미라. 그리고 오손그룹의 후계자인 정지용. 그는 아버지 정대철 회장의 카리스마에 눌려 덜 떨어진 자식이라는 세간의 평을 받고 있다. 그는 뉴욕 대학교에 진학해 10년 가량 뉴욕에서 지냈지만, 여느 재벌 2세들이 그렇듯이 공부에 전혀 열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미국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이, 부도 위기로 거의 망한 듯 보였던 오손그룹이 의문의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정대철은 다시 그룹을 일으켜 세운다. 한편, 대학병원의 의사인 아버지와 같은 대학의 교수인 어머니를 둔 최영주는 학벌과 미모, 집안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정지용의 아버지 정 회장과 최영주의 어머니 홍 교수의 설계대로 두 사람은 맞선을 보고, 순조롭게 결혼한다. 그들의 신혼집은 서울 근교 L시에 오손그룹이 세운, 999대의 CCTV와 수천 개의 디지털 센서로 이루어진 첨단 시스템으로 완벽하게 통제되는 스마트아파트메종드레브였다. 그 전지전능한 스마트 아파트는 정 회장의 야망인 아시아 신청년인재양성 사업의 핵심이자, 그가 가진 신념의 실험장이자 증거물이었다.

 

 

환상은 과연 성공의 장애물일까? 최영주의 유치한 환상은 그녀의 삶을 파멸에 이르게 할 치명적 약점에 불과한가? 혹시 반대가 아닐까? 오직 그녀의 환상이, 그녀의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오판들만이 그녀를 파멸에서 지켜줄 수 있다면? 망상이 그녀의 유일한 구원이라면? 오직 오류들이 그녀를 제정신 속에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면?   p.213

메종드레브의 2백 평짜리 펜트하우스에 사는 정지용은 5평 원룸에 사는 인터넷 BJ 이하나를 로비에서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고졸에 아무 스펙도 없는 이하나는 학교 졸업 후 우연히 인터넷으로 방송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술김에 방송을 시작했다. 먹방을 하다가, 신세한탄을 하다가 그냥 잠들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전혀 꾸며내지 않은 그 자연스러움 덕분에 그녀의 방송은 안정된 궤도에 올라섰고, 지금의 상태에 이렀다. 정지용이 이하나에게 어떤 흥미를 느끼게 되는 계기는 우아한 여왕 같은 아내 최영주와 그녀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최영주가 아이를 임신할 무렵 이하나와 정지용은 내연 관계가 되고,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최영주는 그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우리가 숱하게 욕하면서 보게 되는 연속극 속에 등장하는 재벌들의 치정극 같은 이야기이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요,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에 걸맞은 환상이요."

 

5평 원룸부터 200평의 펜트하우스가 공존하는 메종드레브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 사회적 계층이 다르다는 것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지만 하늘과 땅 차이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니 말이다. 재벌들의 문란한 소비와 끝을 모르는 욕망,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증오하는, 막장 드라마와도 같은 스토리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일 것이다. 김사과가 구축한 메종드레브라는 공간과 뻔해 보이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캐릭터들은 기묘한 방식으로 동거하는 완벽한 유령들이 되어 서늘함을 안겨 준다. 세계의 결함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작가인 김사과, 그녀가 그려내는 새로운 세계에 걸 맞는 환상의 모습에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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