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시를 마무리하는 게 인생의 숙원인 사람도 있다.
그는 평생 시에 매달렸지만 누군가는 평생 회사에 매달렸고, 누군가는 평생 여행에
매달렸다. 어떻게
살아왔건, 무엇을 이루었건
세월이 지나면 귀한 시간을 무심히 흘려 보냈다고 자책한다.
사람들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며 산다. 그마저 뒤늦게 깨닫는다. 후회하지만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러버린 후다.
p.50
때로 어떤 문장은 복병처럼 흘러가는 삶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혹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나를 기다리는 또 다른 생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라면 내가 꿈꾸던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문장들.
하루하루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나날 속에서 일상을 헤치고 튀어나온 그것은 가끔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곤 한다. 그리하여 기꺼이
그 복병에 매료되어 일상을 뒤로 하고 싶을 때,
나는 영화관에 가거나 여행을 떠난다. 영화라면 우리를 단 두어 시간 만에 일상을 벗어난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니까. 여행이라면 언제고
집이 아닌 곳에 있다는 사실에 위로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니 말이다.
이 책은 네 개의
여권에 5백여 개가 넘는
스탬프를 찍었지만, 여전히
다른 세상이 궁금해 길 위에 선다는 저자가 여행을 떠나 다른 세계를 거닐 듯 영화 속으로 떠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한 편의 영화로 중앙아시아로, 남유럽으로, 북아메리카로, 오세아니아로 떠나는 이
여정은, 그야말로 영화를 보며
떠나는 세계일주이다. 저자는
이 책을 한낮의 꿈 같은 이야기이자 로드무비 같은 책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보며 영화 속 시공간으로 빠져 들어가 낯선 이들을 만나고, 주변을 거닐기도 하며, 때로는 지난 여행과 영화가 겹쳐 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영화가 촬영된 장소를 찾아가 영화의 감동을 재생,
증폭하려 하거나,
줄거리를 좇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저자는 영화 속 그곳에 자신의 지난 여행을 살포시 겹쳐
놓는다. 그렇게 스물일곱 편의
영화에 찍힌 바람의 지문을 좇는 여정은 그 어떤 여행에 관한 에세이보다 특별하다.
그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낯선 이에게 이렇게라도 마음을 열어주어 고맙다. 그러고 보니 탄자니아 커피는 견고한
커피다. 기름이 잘잘 흐를
만큼 프렌치 로스트 레벨까지 볶아도 맛이 흔들리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사는 게 좀 쉬워질 줄 알았다. 잘 사는 건 고사하고 흔들리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웬걸, 어림도 없다. 이런 기대를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p.81
뉴욕이건 클리블랜드이건 마이애미이건...
도착하기만 하면 찬란하고 뜨거운 태양을 만나리라.. 낯선 세계로 떠나기만 하면 지금보다는 더 좋을
것 같지만.. 사실 현실의
여행은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들은 종종 여기 아닌 다른 곳을 꿈꾸지만 그곳에 있을 함정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저자는 한때 세상 최고의 도시라고 생각하며 꿈꿨던
뉴욕에 처음으로 갔던 당시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당시 상처받았던 자신의 마음을 영화 <천국보다 낯선>에 오버랩시킨다. 파라다이스를 찾아갔지만 언제나 이방인에 불과했던 영화 속
그녀를, 자신을,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을. 그리고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 나온 그 카페를 실재 모하비 사막에서 찾아가 보기도 하고,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바닷가 산책로를 걸으며 영화 <영원과 하루>를 생각하며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한다. 포르투칼 리스본의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감행했던 일탈에 대해 생각한다.
네 개의
여권에 5백여 개가 넘는
스탬프를 찍는 삶은 어떨까. 저자는 '길 위에
서면 여행하기 전에 내가 알았던 세상이 얼마나 작았는지,
때로는 얼마나 허구인지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으로 전력을 다하는 탐험으로서의 여행, 그 가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듯
언젠가 여행도 끝이 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여행은 마치 끝나지 않는 그것처럼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좀 더 길 위에 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고, 눈 깜짝할 새 흐르는 게 인생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