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문자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실의 사건은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지.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하잖아. 그래서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 불가능해. 항상 커다란 무언가의 일부분일 뿐이야. 그런 점에서 소설은 완성된 구조를 지니고 있잖아. 소설은 하나의 구조물이지. 그리고 추리소설은 그 구조물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일 수 있는 분야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인 <11문자 살인사건>의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가 데뷔 후 다섯 번째로 발표한 소설이었으니, 그야말로 초기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여성 추리소설가인’, 며칠 전에 애인이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말을 한 뒤 살해 당한다. 도쿄 만에서 시체가 떠오른 걸 발견해 형사가 찾아와 그의 죽음을 알렸는데, 나는 그의 장례식에서 주변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이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귄 지 두 달 정도 밖에 안 된 대다, 애초에 결혼 생각 없이 만난 거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교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의 방에서 가져온 스케줄표에 적힌 마지막 일정에 뭔가 의심스러웠다. 요즘은 다리를 다쳐서 운동을 쉬고 있었는데, 스포츠센터에서 만날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애인의 죽음에 의심스러운 부분을 파헤치기 위해 그의 마지막 일정을 따라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에 스포츠센터의 사장을 만났고, 예전에 그 스포츠센터가 기획했던 요트 여행에 참가했다가 사고를 당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트를 타고 Y섬으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중간에 날씨가 나빠져 요트가 전복되었고, 참여했던 열 명 중에 한 사람만 죽고, 나머지는 무인도로 쓸려가 구조되었다는 거였다. 애인은 그때 다리를 다쳤고, 취재로 참여했다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기행문 연재도 끝이 났었다고 한다. 게다가 나는 애인이 남긴 자료를 도난 당하게 되고, 혹시 그 자료가 당시의 사고에 대해 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작년에 일어난 보트 사고 당시에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살인 후에 도착하는 11개의 글자가 적힌 편지는 누가 보낸 것일까? 과연 추리소설가인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만큼, 현실에서도 범인을 제대로 추리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서재 문을 열었다. 당연히 그 방의 불도 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창가에 놓인 컴퓨터만이 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역시 전원이 켜진 상태였다.

내 몸 속에서 꿈틀대고 있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심장박동이 다시 빨라졌다. 불안감에 휩싸인 채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워드프로세서에 적혀 있는 글자를 본 순간, 더 이상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주인공은 초반에 애인과 나누는 대화에서 추리소설의 매력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런 말을 한다. 현실의 사건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한 부분이 있어,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선과 악의 경계선에 대한 질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과연 우리가 '그 살인은 올바른 선택이었다.'라고 결론이 내려질 만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최선은 과연 모두에게도 선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어떤 관점과 입장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악인이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과연 '죽어도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극중 상황처럼 최선의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차선을 택했고, 따라서 그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 역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다.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7년에 발표했던 작품이라 조금 세련된 맛은 덜하고, 정통 추리소설의 형식에 부합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추리소설에 이제 막 입문하는 독자들이 읽기에 쉽고 재미있을 것 같고, 엄청난 반전이나 트릭이 있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요소는 두루 갖추고 있는 작품이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좋아했던 이들이라면 색다른 느낌으로 그의 초기작을 만나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옳다고 믿는 가치는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가치관의 충돌에서 빚어진 비극을 두라며,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선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당신이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