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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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봐봐...... 재수 없는 것들이 왜 이렇게 많아. 놀러 가는 거에 환장한 것처럼 방방 떨고서는 못 가? 가자고 지랄을 떨지 말든가.

전화하다 죽을 뻔한 마누라한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면 어디가 덧난대요?

-누가 하랬어?

미안해요. 하지 말라는 전화 2 3일 해서.

-애썼어..... 엎드려 절 받으니까 속 시원해?

표제작인 <놀러 가자고요>는 노인회장의 아내인 오지랖댁이 동네 주민들에게 제목 그대로 '놀러 가자'고 전화를 돌리는 내용의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 중에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동네에 귀 어두운 노인 분들이 태반이라 아침나절부터 전화로 소리를 박박 질러대는 오지랖댁은 노인회에서 놀러 가기로 한 날짜에 몇 명이나 참석할 수 있는 지 확인 중이다. 30명은 가줘야 된다며 확인할 겸 웬만하면 가자고 설득할 겸 전화를 돌리는 중인데, 가겠다는 사람은 없고, 다들 엉뚱한 소리만 해대고 있다. 손녀딸이 백일장에서 상을 탔다는 얘기, 둘째 놈 사업이 망해서 부인이 병원에 누워 있다는 얘기 등 각자 자신의 이야기만 해대거나, 엉뚱한 소리만 하다가 결국 못 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렇게 전화를 삼백 통은 한 거 같다고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고서야 겨우 돌아오는 대답은 "애썼어." 농촌이라는 공간이 주는 독특한 정서가 다양한 마을 사람들의 사연과 성격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가가 나고 자란 백호리범골이라는 농촌 마을을 주된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농촌 소설이라고 해서 따분할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이 작품 속 농촌의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소위어르신이라 불리는 노인들은 우리가 쉽게 예상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제역이 코앞까지 닥친 상황에서 키우는 소의 산후조리를 하게 된 사연, 시골집으로 어머니를 뵈러 와서 만나게 된 욕조기 외판원과의 에피소드, 아홉 살짜리 아들이 내쉬는 한숨이 성장통과도 같은 평범한 현상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는 부모의 이야기, 못자리철이 한창인 마을에 모인 일꾼들이 봇도랑 치기 내기를 벌이는 이야기 등등.. 다양한 사연들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펼쳐진다. 소박하지만 사람 냄새 나고, 쓸쓸한 정서 너머로 풍겨나는 묘한 활력이 인상적인 이야기들의 향연이다. 그야말로 김종광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김종광 월드인 셈이다.

어머니 일기장을 보면 안심이 된다. 어머니가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그 마음을 누구에게 혹은 어디에다가 풀었을 것인가. 어머니는 죽고 싶을 정도로 거시기한 마음을 종이에 풀었을 뿐이다. 요즘 일기에 쓰는 어머니의 '죽고 싶다'는 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별생각 없이 그냥 쓴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도시의 자식은 섬쩍지근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작년에 <조선통신사>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김종광 작가의 소설집이다. 네 번째 소설집 이후 8년 만에 다섯 번째 소설집이 나왔다고 하는데, 작가의 단편은 처음 만나는 독자로서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국내 소설 작가들이 그려내는 분위기와 김종광의 그것이 매우 달랐기 때문인데, 인물이며, 말투며, 분위기며 아무래도 2018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옛날 옛적의 그것 같았으니 말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노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도 그러했고, 위트와 유머보다는 해학과 풍자가 더 어울리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을 읽는 기분도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어쩌면 내가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려서인지도 모르겠고, 김종광 작가의 특유의 걸출한 입담과 페이소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김유정의 반어, 채만식의 풍자, 이문구의 능청스런 입담을 갖춘 작가라는 평가가 괜한 말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루하고 사소한 농민으로서의 삶을 경이롭고 기억할 만한 사건의 연속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이 작품에서 보여진 것 같아서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농촌이라니, 꼭 옛날 옛적의 이야기 속에서나 배경으로 등장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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