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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같은 과장에게 성희롱 당하다 퇴사했다는 직원은 소진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때 자신이 조용히 덮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소진도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책했다. 물론 소진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덮고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에서 촉발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가 얼마 전 대학로에서 있었다. "울지마 지워 줄게, 죽지마 지켜 줄게, 우리가 싸워 줄게."라는 플래카드의 문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나마 지금은
여성들을 향한 지긋지긋한 편파와 차별에 마냥 입 닫고 있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라는 점이 작은 위로가 된다. 조남주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작품으로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자료로 이루어진 '목소리 소설'을
통해 보여줬었다. 그녀는 <82년생 김지영> 이후 아홉 살부터 일흔아홉 살까지
60여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의 삶을 더 많이 드러내고 기록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경향신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제목의 르포 기사로 연재되었고,
저마다의 인생은 소설로 다시 쓰이고 28편의 이야기로 묶여 소설집으로 출간되었다.
이십 대 후반의 소진은 사수인
과장의 성폭력을 팀장에게 알렸지만, 법적 조치는커녕 회사 차원의 징계도 없었다.
과장은 대놓고 소진을 나무라기 시작했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를 많이 주고, 화를 내고 괴롭히기 시작한다. 인사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지만, 인사팀에서는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잘 화해하라고 설득하며 일을 대충 마무리하려고 한다.
소진에 대한 있지도 않은 소문들이 만들어져 사내에 돌기
시작하고, 그녀가 노동청에
직장 내 성폭력으로 진정을 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거라곤 따돌림과
“사회부적응자,
또라이,
사이코패스”라는 폭언이었다. 이 이야기는 미투가 당사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소진 역시 폭로와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자신의 선택을 매일, 매 순간 후회하면서도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이기든 지든 이 싸움을 마무리 해야겠다 라고 다짐한다. 제도, 규범, 상식 중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녀도 이런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사는 업무량이 너무 많고 어린아이 키우는 직원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남편은 당연히 육아가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사회는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을 '극성'이라
매도한다. 그럼에도 엄마들은
직장을 다니건 다니지 않건 서로 도우며 자기 몫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지혜는 달라져야 하는 것은 엄마들이 아니라 남편과 학교와 회사와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SNS에서
미투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Metoo(나도 당했다)라는
말은 어마어마한 파문을 일으켰다. 할리우드 거물 영화 제작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배우들의 폭로가 이어지며, 봇물 터지듯 너도나도 피해 사실을 고백했던 것이다. 미투 운동은 영화계를 넘어
정치계, 스포츠계, 교육계
등으로 확산됐고, 국내의
정치계와 연예계, 교육계 등
사회 곳곳에서 미투를 외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랬던 터라 이 소설집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
졌다. 성폭력이 일상화된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 여성들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방송작가 이야기, 어린 여자 혼자서 저층에 살 수 없는
이유,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가사와
노동 두 영역에서 소진되어 버린 중년의 여성,
제도 속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는 동성 커플의 불안, 그리고 올해로 12년째 해결되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는 KTX 해고 승무원의
이야기까지.. 이 작품 속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겪어오는 삶의 형태들이 그려져 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조남주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녀는 이제 마흔이 되었고,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지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주변의
사람들을, 조직을, 더
넓게는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는 말을 그냥 흘려버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덕성의 기준이 끝도 없이 추락한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름 뒤로 숨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여기 대한민국을 살아내고 있는 그녀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