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간단히 말해 부인은 모든 것을 잘해냈고 좋은 삶, 자신이 원하는 삶,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을 꾸렸다. 지금 여기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있었다. 거미 무용수의 사진처럼 리처드슨 부인은 이런 삶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클리블랜드의 고요하고 우아한 지역사회 셰이커하이츠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규칙이 많은 곳이었다. 도로 구획부터 주택 외벽 색깔 등 셰이커하이츠의 모든 것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지역 신문 기자가 된 리처드슨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변호사 리처드슨은 네 자녀들과 함께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슨 부인은 부모가 물려준 작은 집을 세놓고, 그곳에 미혼모인 미아와 그녀의 딸 펄이 이사를 오게 된다. 예술가인 미아는 그들 모녀가 겨우 먹고 살 정도만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제 일자리를 얻어 일을 했고, 그 외의 시간은 매일 자신의 예술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그들 모녀는 미아의 프로젝트에 따라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이동해왔고, 이번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정착하기로 한다.

리처드슨 가족의 네 자녀들은 고3인 렉시, 2인 트립, 1인 무디, 그리고 열넷인 막내 이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디는 금방 펄과 친구가 되고, 매일 같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펄은 무디와 함께 그의 집에서 리처드슨 가족들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태생과 배경이 전혀 다른 두 가정의 아이들은 서로의 삶에 이끌리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펄은 리처드슨가의 아이들이 꾸미지 않은 편안함과 자신감, 리처드슨 부부의 고상함을 동경했고, 반대로 무디는 미아 모녀의 예술적인 떠돌이 생활 방식을 낭만적으로 느낀다. 렉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동생 이지보다 펄과 더 자매처럼 지내게 되고, 펄은 잘생기고 매력적인 트립과 사랑에 빠진다.

 

 

 

"그게 신경쓰이는 거군요, 그렇죠? 당신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왜 누군가는 당신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지. 왜 누군가는 넓은 잔디밭이 딸린 큰 집과 멋진 차와 사무직 말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지, 왜 누군가는 당신이 선택한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하는지."

이제 미아가 리처드슨 부인을 살필 차례였다. 부인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얼굴에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듯이.

"당신은 두려운 거예요. 무언가를 놓쳤을 까봐. 자기가 원하는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포기했을 까봐."

평생 질서 있고 엄격한 삶을 살았던 리처드슨 부인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리처드슨 부인의 오랜 친구인 린다가 버려진 아기를 입양하게 되면서 그들의 미묘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친모가 나타나 양육권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아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리처드슨 부인이 분노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기자라는 것을 이용해 미아의 뒷조사를 하게 되는데, 상상치도 못했던 숨겨진 과거의 비밀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대단히 영리하고,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한 문장, 탄탄하게 짜임새 있는 구조, 페이지를 바삐 넘기게 만드는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 이 정도로 묵직한 울림을 남겨주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내는 과정이 지난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너무도 술술 읽힌다. 마치 티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전개되는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는, 그래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혹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영리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모녀 관계가 등장한다. 리처드슨 부인과 막내 이지의 관계, 그리고 미아와 펄의 관계. 자세한 이들의 사정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절대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는 관계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이 처해 있는 독특한 상황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해의 눈으로 보고 싶게 만드는 힘 또한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 사소한 행동,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서 뒤에 이어질 사건의 단서가 되고, 복선이 된다. 누구나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불씨처럼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의문과 억눌렀던 욕망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이 작품은 바로 그 불씨를 피어 오르게 만드는 발화점과도 같다. 때로는 이렇게 모든 걸 완전히 태워버리고 나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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