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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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서른 한 살 때 자신의 첫 작품이었던 <유럽의 교육>에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숲 속에 숨어 살며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열네 살 소년 야네크는 추위와 배고픔, 희망이 사라진 전쟁의 한 가운데서 쇼팽의 폴로네즈를 듣고 감동한다. 독일 군인들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몸을 파는 열 여섯 살 소녀 조시아가 원하는 건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이었는데, 그 소박한 바램조차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로맹 가리는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인물인 도브란스키를 통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후 예순 한 살 때 그는 에밀 아자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열네 살 소년 모모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그녀가 맡아 기르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로자 아줌마는 성매매를 하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맡기거나,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었다. 모모 역시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강제로 수용되었던 끔찍한 기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늙고 뚱뚱해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칠층을 오르내리는 것을 힘들어 한다.

 

모모는 엄마가 자신을 보러 오게 하기 위해 복통과 발작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위험한 무단 횡단을 하며, 마약 하는 친구들을 사귀는 등 문제 행동만 골라서 한다. 하지만 모모는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로자 아줌마가 병을 앓고 죽어갈 때 곁에서 그녀를 보살핀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상처받고, 가진 것도 없는 두 사람이 좁고 냄새 나는 아파트에서 서로 손을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은 뭉클하고, 아름다웠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 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한 번만 읽어도 충분한 소설은 읽고 나서 가급적 책꽂이 멀리, 한 구석에 놔둔다. 한번 더 읽고 싶은 소설은 서재에서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위치 혹은 잘 보이는 곳에 놓아 둔다. 그래서 언제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서 단어와 문장과 행간과 이야기 속을 들여다보곤 한다. <자기 앞의 생>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뒤로 십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몇몇 문장들과 몇몇 장면들을 나는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된 버전은 무려 일러스트 버전이다. 사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세계 문학들에는 대부분 삽화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글자가 빽빽하고, 페이지가 두꺼운 책을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자에서는 미처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이미지만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열네 살 소년 모모와 그 눈에 비친 세상이 세피아톤의 일러스트 약 80컷으로 보여지고 있는 이 작품은 원래의 이야기와 일러스트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극 초반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모모는 생각한다. 사랑해야 한다고.

열네 살 소년 모모가 깨우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생의 비밀을 이렇게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만날 수 있다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름답고, 뭉클하고, 눈부신 작품이었다. 아직까지 이 작품을 만나보지 않은 분들은 꼭 일러스트 버전으로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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